미감리회 로제타 홀 선교사는 43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서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 설립(현재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 설립, 또는 시작했다. 또 한국의 최초여의사(서양의학), 박점동(에스더 K.박)을 키웠고, 한국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도 일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여성 200인 중 한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선교사의 꿈을 갖다
로 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 9. 19~1951. 4. 5, 한국명 허을(許乙))은 미국 뉴욕 주 셜리반 카운티에 있는 리버티(Liberty)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셔우드(R. Sherwood)와 어머니(P.G. Sherwood)의 딸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체이스넛리지학교와 뉴욕의 오스웨고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얻어 1년간 체이스넛리지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이런 평범한 교사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 때 그 지역에 방문한 미감리회 토번(J.M. Thoburn) 감독과 그의 부인이자 의사인 챈들러(K. Chandler)의 강연 중 ‘인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의료선교’라는 말에 감동 받아 의료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됐다. 그녀는 1886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1889년 졸업했다.
조선의 의료선교사로 파송되다
로 제타 선교사는 졸업 후 감리교 여성 자선의 집(The Methodist Deaconess Home)에 지원하여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선교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바로 그의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을 만나게 된다. 둘은 1889년 8월 약혼하고, 함께 의료선교사로 활동할 것을 약속했다. 로제타는 처음에 중국 의료선교사로 가려 했으나 하워드의 후임으로 조선에 나오게 됐다.
그 무렵 하워드(M. Howard)에 의해 한국에서 시작된(1887)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이 하워드의 건강 악화로 1889년 귀국한 이후 중단 상태에 있자 한국의 선교사들이 미국 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급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1890 년 8월22일 고향 리버티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로 떠나 18일 만에 요코하마에 와서 고베, 나가사키를 거쳐 10월 10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의 광경을 고향의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제2의 고향이 될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언 덕과 산들은 구불구불하고 가파르며 바위가 많고 거의 불모지와 같았습니다. 부산은 일인거주지였습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그림과도 같습니다." 다시 부산을 출발해 10월13일 제물포에 상륙,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정동에 있는 스크랜턴의 집에 짐을 풀고 얼마 후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으로 숙소를 옮겼다.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 첫날 4명의 환자를 시작으로 열 달 동안 2천명 이상을 치료했다.
한말 셔우드가 보여준 의료기술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맹장수술을 할 때는 세인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환자들이 죽음 일보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얻고 기쁨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 많았다.
결혼과 남편의 순교
1889 년 윌리엄 제임스 홀과 약혼한 로제타 선교사는 1892년 6월27일에 조선에서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것이 조선에서 있어진 최초의 서양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1894년 남편이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자 그녀도 평양으로 갔다.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치료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 해 청일양국 군대의 혈전장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로제타는 남편과 함께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활약했다.
이 때에 신변을 걱정하여 감리교 선교부 서울본부에서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닥터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계속 머물며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에 감염 돼 1894년 11월24일 순직 양화진에 묻히고 말았다. 로제타와 결혼 2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로제타 홀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고 회고했다.
조선으로의 귀환, 딸의 죽음
남편이 죽은 후 그 해 12월 로제타 홀에게는 셔우드 홀이라는 두 살 난 아들과 뱃속에 7개월된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출산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딸 에디스를 출산한 로제타는 귀국하기 전 로제타는 남편의 유산과 친지들의 부의금을 모아 한국에 보냈고, 결국 1897년 1월에는 홀의 유업을 기리는 홀기념병원(또는 紀忽病院)이 평양에 건립됐다. 폴웰(E. Follwell) 박사가 이를 인수 경영하였다.
이 병원은 개원한 지 일년도 안 되어 3천명이 넘는 환자가 진료를 받았다. 그 해 11월 다시 조선에 돌아온 로제타는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보다가 1898년 5월 평양으로 파송 받아 평양에서 여자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설립하였고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병 원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또 한번의 비극을 맞이하는데 딸이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딸의 시체를 김창식 목사의 등에 업힌채 평양서 양화진까지 걸어서 묻었다. 로제타는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며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때 미국에 있을 때 들었던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선교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졌다.
의료선교의 선구자적 역할 감당
당 시 조선 부인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메타 하워드 여자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고 한국 최초 부인병원인 보구여관(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메타 하워드 의사에 의해 1887.10.20.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졌으나 그녀는 2년 만인 1889년, 건강상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했다.
후 임으로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Miss. Rosetta Sherwood, M.D.)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녀는 오자마자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어걸고 의료사업과 함께 여성들을 모아놓고 의료강습을 시작했다.
홀 부인은 한국인 조력자 박 에스더(박점동)와 함께 평양 일대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이 후 홀 부인은 자녀와 조력자였던 박 에스더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간다. 거기서 박 에스더는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가 된다. 1897년, 홀 부인은 남편의 순교지인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의료선교를 재개했다.
후 에 미국에서 의사가 된 박 에스더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들은 또 다시 평양에서 힘을 합치게 된다. 과거에 박 에스더는 미숙한 조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동역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해서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열었다.
그의 이러한 수고가 인정이 되어, 1908년 4월28일에는 7천8백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 에스더는 1910년 폐침윤에 걸려 34세를 일기로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그 녀는 의료계의 귀중하고도 획기적인 사업을 두 가지를 시작했다. 첫째는 간호원 양성이고, 둘째는 여자의학반의 창설이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여성의료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보구여관 구석방에서 간호원 지망생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박에스더가 첫 학생이었다.
한 편, 그녀는 병원에서만 환자를 돌보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산골민을 위해 지방순행을 하였다. 안주, 운산, 의주, 때로는 청천강을 건너 운산 저쪽의 깊은 산골짜기까지 안 다닌 곳이 없었다. 말에다 각종 의약품과 치료 후에 줄 복음서 및 실용품 등을 싣고 벨을 울리면서 여행하였다. 마을마다 대환영을 받았으며 오는 환자들을 친절히 치료해 주고 약을 주고 싸매 주었다.
밤 에는 노블 선교사와 동행해 동리 사람들을 주막에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 1906년 광혜여원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2년 후 새 건물을 마련했다. 1917년 서울로 자리를 옮겨 보구여관의 후신인 동대문부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의사 겸 약제사로 활약했고, 1920년경부터 여자의학반을 조직하여 한국인 여자의사 양성을 시작하였다. 이 의학반은 1928년 경성여자의학교로 인가를 받아 정규 의학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후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그 녀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관장하며 아들의 해주 구세병원 및 해주 구세요양원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33년 구세요양원 내에 그녀의 이름을 딴 로제타기념예배당이 건립됐다. 1935년 건강이 쇠하여져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1943년 은퇴하고 뉴저지에 있는 안식관에 들어가 말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1951년 4월5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녀의 유해는 화장되어 남편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죽어서도 조선을 잊지 못한 그녀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쓴 남편의 전기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1897)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 상황 및 구한말 국내정세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최초 점자책을 펴내다
처 녀 때 본국에서 맹인용 점자사용법(New York Point)을 배운 적이 있는 그녀는 평양에서 의료사업을 할 때 오씨라는 보조원의 어린 딸인 봉래가 앞을 보지 못하므로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후 본국에 가 있는 동안 뉴욕의 맹인연구소를 방문하여 점자법을 좀 더 세밀히 연구하였다.
이 때 연구한 점자법이란 뉴욕 포인트 시스템(New York Point System)에다 한글을 적용하여 한국인 맹인들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것을 위해 몰두했었다. 1897년 광혜여원 방 하나를 내어 자신이 고안한 점자사용법을 이용하여 봉래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이 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실시한 맹인교육이었다. 봉래를 시작으로 지방에서 데려온 학생들을 모아 마가렛병동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평양맹아학교가 되었다. 1908년까지 하다가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다음해부터 맹인 전문가인 록웰 씨에게 인계했다.
1922 년 9월 환갑을 맞은 그녀의 생일날 내외빈과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참석한 한국식 잔치가 한국인들의 극진한 배려로 베풀어졌다. 환갑을 맞이하여 많은 기념사가 있었는데 가장 아낌없는 찬사는 불행한 맹인을 위한 교육과 여성 의학교육이었다. 마지막에 장내를 눈물로 감격시킨 선물은 그녀의 은혜를 잊지 못한 맹인 여성이 그녀가 가르쳐준 뜨개질로 손수 한복을 짜서 선물한 것이다. 이 여성은 그녀가 학교를 세울 때 거기서 배운 학생이었다.
1898년 그녀가 편찬한 현재 최초의 점자책은 대구대학교 점자도서관 2층에 전시되어 귀중한 자료로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교의 피
서 울에서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J. Hall)과 어머니 로제타 홀(R.S. Hall)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 11. 10~1991. 4. 5, 한국명 하락(賀樂))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다. 어린시절 그의 놀이 상대는 거의가 조선아이들로아이들에게서 조선놀이를 배웠고, 그들처럼 행동했으며, 사고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13 세 되던 1906년 8월 원산의 캐나다 의료선교사인 하디(R.A. Hardie)를 초청하여 평양의 남산현교회에서 예배하던 중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도 저분처럼, 아니 우리 부모님처럼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리라." 하디의 설교는 어린 셔우드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1900 년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 주의 마운트허몬학교에 입학, 1915년 졸업하했다. 같은 해 오하이오 주에 있는 마운트유니온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셔 우드는 서울과 평양에서 자라면서 한국인이 결핵으로 젊은이와 어린이들까지 죽는 것을 보았고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캐나다의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흉부질환과 폐결핵을 전공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졸업 1년 전 같은 의과대학 출신의 산부인과 전공 여의사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1922년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1926년 4월19일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다. 부부는 곧 해주 구세병원(일명 노튼기념병원)에 부임해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또한 해주 남학교인 의창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이 엄청난 책임 앞에 셔우드는 깊은 고독감과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때 마음속 깊은 데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너는 지금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주님이 도와주시고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이 순간 그는 자신을 얻었고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여러 방면으로 모금운동을 하면서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결핵요양원 설립을 추진해 어머니와 선교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어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건립하고 1928년 10월27일에 헌당식을 거행 했다.
또 한 요양원 안에 결핵위생학교를 설립, 결핵퇴치를 위한 제도적인 교육도 실시했다. 1930년 6월27일 그는 아내와 함께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선교부의 소개로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씰의 창안자 비셀(Emily P. Bissell) 여사를 만나 크리스마스 씰 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왔으며 총독부 당국의 협조를 얻어 1932년 크리스마스 때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했다.
또 한 그는 구세병원, 구세요양원, 결핵위생학교, 해창학교 등 여러 기관의 책임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부모의 뒤를 이은 2대 의료선교사로 특히 한국 결핵의 퇴치와 예방사업에 20여 년 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33년에는 구세요양원 안에 어머니의 업적을 기리는 로제타기념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1938 년 두 번째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갔다가 1939년 가을에 돌아왔으나 국내 사정은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선교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40년 8월 일본 경찰은 그에게 범죄자란 누명으로 10월 재판에서 3년 징역형 또는 벌금 5천 엔을 선고하였다.
그 는 결국 병원 일을 한국인 의사 문창모에게 맡기고 1940년 11월 한국을 떠나야 했다. 선교본부의 명으로 인도에 부임하여, 파키스탄 접경인 마다(Madar)에 있는 마다 유니온요양원에서 23년간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크리스마스 씰을 시작하였고 결핵퇴치운동을 하였다. 1963년 은퇴한 후 인도 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귀국 길에 한국에 들러 대한결핵협회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은 퇴 후 캐나다에 머물면서 자선의사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4년 11월3일 셔우드 홀 내외가 꿈에도 그리던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자 곧 양화진의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기자회견ㆍ환영리셉션, 11월7일 보사부장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1월10일 출생지인 서울에서 91회 생일잔치를 대한결핵협회 주최와 많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치렀고 11월 11일 캐나다로 귀국하였다. 1991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그 가 1978년 쓴 회고록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는 홀의 가문과 한국 선교 업적 및 일제시대 의료선교와 교회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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