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1
밧으라 권하니~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 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도마스 목사전>중에서
로버트 토마스는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품었습니다.
23세에 중국 땅에 도착한 토마스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고 마음에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1866년 미국 제너럴셔먼 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고,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는 지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한문성경책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쇄국정책으로 외국정세에 문이 닫혀있던 조선은 대동강에 도착한 제너럴셔먼 호와 무력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는 젊디젊은 27세의 나이에 평양 대동강변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처참하게 순교를 당합니다.
윗글은 대동강변에서 피를 흘리며 성경을 나누어준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죽인 박춘권이란 사람이 쓴 글입니다. 이는 훗날 예수를 믿고 요즘의 장로와도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아 평양에서 신앙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됩니다.
조선 땅에 씨를 뿌린 사명,
그것이 토마스 선교사의 사명이었습니다.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2
고려문에서 시작된 성경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존 로스와 멘켄타이어는 1872년 8월 중국 땅으로 옵니다. 그 곳에서 조선민족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눈물로 듣고 조선 민족을 가슴에 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여전히 외세에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바로 고려문이지요.
1874년, 두 선교사는 만주 통화현 고려문에 도착, 조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타게 기다리는 중 의주 출신 이응찬과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문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의 번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 로스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고려문에 홍삼을 팔러 갔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그렇습니다. 서상륜이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게 되고 동시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소래교회의 시초가 됨)
존 로스는 이 두 형제의 도움으로 <마태복음>,<로마서>를 번역했고 마침내 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신약성서 <예수셩교젼서>를 10년만에 완간합니다.
여러분 손에 들려있는 성경은 최초의 ‘로스 역’부터 여러번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선 땅에 뿌리기 위해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3
조선 유학생이 품은 복음의 빛
"예수교는 사교가 아니라네. 산상수훈만 봐도 평등주의 사상이지 않는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형제라는 거야."
'도대체 야소교가 뭐길래 그 친구가 그렇게 미쳐 있을까.'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이수정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그의 친구 안종수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왕후 민비의 생명을 구한 공로로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길이었습니다.
그는 안종수의 소개로 농학자 쓰다센을 찾게 되고 기독교인이었던 그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소개받게 되고 한문성서를 얻어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수정은 냉철한 사상가였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과학적 진리에 힘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에 도착한지 7개월만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미국 선교잡지<Foreign Missionary> 1884년 9월호에는 세례를 받은 이수정과 조선 유학생들의 입교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받은 우리 선교사들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들을 임명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는데… 최근 선교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 목사를 임명했다.
또한 그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한문성서에 토(吐)를 단 현토성서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여 이후 1885년 부활 주일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바로 이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언더우드의 생애
인도 선교사로 가기위해 이미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던 언더우드였습니다. 어느 신학생집회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면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선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조선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다, 조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언더우드는 이와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조선을 향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문호를 개방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조선 땅의 위험과 핍박을 무릅쓰고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에 도착합니다.
26세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는
사진1 알렌 부부
사진2 언더우드 가족- 한복입고 있는 사진
사진3 언더우드 타자기
사진4 언더우드 조선어 공책
사진5 광혜원
사진6 병원 환자모습
사진7 아펜젤러
사진8 배제학당
사진9 이화학당
사진10 로제타 셔우드 홀
사진11 로제타의 딸을 향한 편지
사진12 로제타 아들 셔우드홀의 글
사진13 존헤론
밧으라 권하니~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 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도마스 목사전>중에서
로버트 토마스는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품었습니다.
23세에 중국 땅에 도착한 토마스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고 마음에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1866년 미국 제너럴셔먼 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고,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는 지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한문성경책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쇄국정책으로 외국정세에 문이 닫혀있던 조선은 대동강에 도착한 제너럴셔먼 호와 무력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는 젊디젊은 27세의 나이에 평양 대동강변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처참하게 순교를 당합니다.
윗글은 대동강변에서 피를 흘리며 성경을 나누어준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죽인 박춘권이란 사람이 쓴 글입니다. 이는 훗날 예수를 믿고 요즘의 장로와도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아 평양에서 신앙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됩니다.
조선 땅에 씨를 뿌린 사명,
그것이 토마스 선교사의 사명이었습니다.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2
고려문에서 시작된 성경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존 로스와 멘켄타이어는 1872년 8월 중국 땅으로 옵니다. 그 곳에서 조선민족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눈물로 듣고 조선 민족을 가슴에 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여전히 외세에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바로 고려문이지요.
1874년, 두 선교사는 만주 통화현 고려문에 도착, 조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타게 기다리는 중 의주 출신 이응찬과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문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의 번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 로스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고려문에 홍삼을 팔러 갔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그렇습니다. 서상륜이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게 되고 동시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소래교회의 시초가 됨)
존 로스는 이 두 형제의 도움으로 <마태복음>,<로마서>를 번역했고 마침내 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신약성서 <예수셩교젼서>를 10년만에 완간합니다.
여러분 손에 들려있는 성경은 최초의 ‘로스 역’부터 여러번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선 땅에 뿌리기 위해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3
조선 유학생이 품은 복음의 빛
"예수교는 사교가 아니라네. 산상수훈만 봐도 평등주의 사상이지 않는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형제라는 거야."
'도대체 야소교가 뭐길래 그 친구가 그렇게 미쳐 있을까.'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이수정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그의 친구 안종수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왕후 민비의 생명을 구한 공로로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길이었습니다.
그는 안종수의 소개로 농학자 쓰다센을 찾게 되고 기독교인이었던 그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소개받게 되고 한문성서를 얻어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수정은 냉철한 사상가였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과학적 진리에 힘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에 도착한지 7개월만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미국 선교잡지<Foreign Missionary> 1884년 9월호에는 세례를 받은 이수정과 조선 유학생들의 입교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받은 우리 선교사들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들을 임명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는데… 최근 선교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 목사를 임명했다.
또한 그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한문성서에 토(吐)를 단 현토성서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여 이후 1885년 부활 주일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바로 이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언더우드의 생애
인도 선교사로 가기위해 이미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던 언더우드였습니다. 어느 신학생집회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면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선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조선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다, 조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언더우드는 이와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조선을 향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문호를 개방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조선 땅의 위험과 핍박을 무릅쓰고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에 도착합니다.
26세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는
사진1 알렌 부부
사진2 언더우드 가족- 한복입고 있는 사진
사진3 언더우드 타자기
사진4 언더우드 조선어 공책
사진5 광혜원
사진6 병원 환자모습
사진7 아펜젤러
사진8 배제학당
사진9 이화학당
사진10 로제타 셔우드 홀
사진11 로제타의 딸을 향한 편지
사진12 로제타 아들 셔우드홀의 글
사진13 존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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