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홀이 쓴 조선 회상을 읽었다.
다 읽고,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어서 저자 서문까지만 읽어 놓은 상태이다.
책은 꼭 작은 사전 처럼 두껍게 생겨서 정감가게는 생기지 않았지만,
읽다보면 몰입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다른 어딘가에서 읽은 것 처럼,
한국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다른 이유로는,
감리교, 장로교, 그리고 다른 교파의 선교 활동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많은 부분 협력하는 분위기에서 이루어 졌다는데에 있겠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선교사는 어떤 존재였을까?

생김새가 특이하니 구경거리였을 것이고,
초기에는 전통과 고유의 치료법을 무시하는 존재들이었을 것이고,
나중에는 명의로 알려져서 찬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버려지는 아이들과 장애인과 병자들을 돌보는 쓸데 없는 일을 하는 자들,
하지만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당에 다니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고,
좋은 환경의 일감을 얻을 수 있는 구직의 장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원수처럼 여겼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친근하게 대했을 것이며,

그 중에는 진짜 친구도 생겨났겠지...


선교사의 결혼을 자기의 이해 대로 축하하고,
선교사의 출산을 자기의 전통 대로 기뻐하며,
선교사의 죽음을 자기의 방식 대로 애도하는...

그 시절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했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을까...

사람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슬퍼하고,
자기들의 이해대로 느끼고 기뻐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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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Possible/한국선교역사 | Posted by lamie 2007. 11. 10. 03:18

족자원고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1
밧으라 권하니~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 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도마스 목사전>중에서

로버트 토마스는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품었습니다.
23세에 중국 땅에 도착한 토마스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고 마음에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1866년 미국 제너럴셔먼 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고,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는 지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한문성경책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쇄국정책으로 외국정세에 문이 닫혀있던 조선은 대동강에 도착한 제너럴셔먼 호와 무력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는 젊디젊은 27세의 나이에 평양 대동강변에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처참하게 순교를 당합니다.

윗글은 대동강변에서 피를 흘리며 성경을 나누어준 토마스 선교사를 직접 죽인 박춘권이란 사람이 쓴 글입니다. 이는 훗날 예수를 믿고 요즘의 장로와도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아 평양에서 신앙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됩니다.

조선 땅에 씨를 뿌린 사명,
그것이 토마스 선교사의 사명이었습니다.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2
고려문에서 시작된 성경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존 로스와 멘켄타이어는 1872년 8월 중국 땅으로 옵니다. 그 곳에서 조선민족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토마스 선교사의 이야기를 눈물로 듣고 조선 민족을 가슴에 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여전히 외세에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게 됩니다. 바로 고려문이지요.
1874년, 두 선교사는 만주 통화현 고려문에 도착, 조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타게 기다리는 중 의주 출신 이응찬과 그의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문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의 번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 로스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고려문에 홍삼을 팔러 갔던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그렇습니다. 서상륜이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게 되고 동시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소래교회의 시초가 됨)
존 로스는 이 두 형제의 도움으로 <마태복음>,<로마서>를 번역했고 마침내 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신약성서 <예수셩교젼서>를 10년만에 완간합니다.

여러분 손에 들려있는 성경은 최초의 ‘로스 역’부터 여러번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선 땅에 뿌리기 위해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조선을 향한 복음의 씨앗3
조선 유학생이 품은 복음의 빛

"예수교는 사교가 아니라네. 산상수훈만 봐도 평등주의 사상이지 않는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형제라는 거야."
'도대체 야소교가 뭐길래 그 친구가 그렇게 미쳐 있을까.'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이수정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그의 친구 안종수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왕후 민비의 생명을 구한 공로로 고종의 후의를 입어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길이었습니다.
그는 안종수의 소개로 농학자 쓰다센을 찾게 되고 기독교인이었던 그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소개받게 되고 한문성서를 얻어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수정은 냉철한 사상가였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과학적 진리에 힘을 쏟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일본에 도착한지 7개월만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미국 선교잡지<Foreign Missionary> 1884년 9월호에는 세례를 받은 이수정과 조선 유학생들의 입교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받은 우리 선교사들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들을 임명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는데… 최근 선교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 목사를 임명했다.

또한 그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한문성서에 토(吐)를 단 현토성서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여 이후 1885년 부활 주일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바로 이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언더우드의 생애
인도 선교사로 가기위해 이미 인도 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있던 언더우드였습니다. 어느 신학생집회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면서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조선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조선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다, 조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언더우드는 이와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조선을 향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문호를 개방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조선 땅의 위험과 핍박을 무릅쓰고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에 도착합니다.
26세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는


















사진1   알렌 부부
사진2   언더우드 가족- 한복입고 있는 사진
사진3   언더우드 타자기
사진4    언더우드 조선어 공책
사진5    광혜원
사진6     병원 환자모습
사진7     아펜젤러
사진8     배제학당
사진9     이화학당
사진10     로제타 셔우드 홀  
사진11     로제타의 딸을 향한 편지
사진12     로제타 아들 셔우드홀의 글
사진13     존헤론

1907년 평양에 성령은 어떻게 임하셨는가?
How The Spirit Came to Pyung Yang

그레이엄 리(Graham Lee, 이길함)

1906
8, 우리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연합 사경회를 개최했는데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산의 하디( R.A. Hardie) 박사가 와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자신의 삶을 완전히 조종하시고 주님께 봉사하도록 강하게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사경회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선교사 연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갔고, 그곳에서 하워드 존스턴(Howard Agnew Johnston) 박사를 만났는데, 그를 통하여 서울 선교사들이 매우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스턴 박사가 평양에 와서 머무는 동안, 우리 한국인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인도에서 성령이 놀랍게 나타나신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존스턴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 성도들도 똑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열망이 생겨나고 나서부터 축복이 임할 때까지 그 일을 위해 한국인 성도들과 선교사들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연례회에 돌아와서 특별 기도회를 몇 차례 가지면서 하나님의 영이 쏟아 부어지기를 기도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국인 성도들은 집회에 즐겁게 참여했지만 성령은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기도했으며 성탄절을 지내면서 우리 선교사들의 마음 속에 특별 기도주간을 가지자는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이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회가 끝나기 전에 남성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700명의 성도들이 2주간 동안 성경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이 겨울 사경회 때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강렬한 기대감을 주셔서, 우리 장로교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이 겨울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도 큰 이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오 기도집회를 우리에게 '벧엘'(bethel)이었기 때문입니다.
1907
1 6, 우리는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 시내 4개 장로교회 교인들이 참여한 연합 겨울 사경회를 저녁 기도회로 시작했습니다. 이 집회를 남자와 여자가 함께 드리기에는 예배당 건물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장대현 교회에서는 남자 성도들만 모이도록 했고, 여자 성도들은 네 개의 다른 장소로 나누어 집회를 갖고, 학생들은 숭덕학교 부속 예배당에서 집회를 갖도록 했습니다.
장대현 교회는 약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데. 매일 밤 교회는 만원이었습니다. 집회는 토요일 저녁까지 매 저녁마다 열렸는데 능력이 점증적으로 나타났고 토요일 저녁 집회 때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주일 낮에는 각 교회로 흩어져 정규 예배를 드렸고, 주일 저녁에 다시 장대현 교회에 모여 연합으로 계속 집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저녁 집회 때부터 위대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지만 큰 축복을 받지는 못했고 그 대신 대단히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회는 마치 죽은 것 같았고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설교를 한 번 하고 몇 명이 피상적인 신앙고백을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자백한 것인 없었던 셈인데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가진 채 숙소로 갔습니다. 그 이전까지 집회에서는 혼이 깃든 신앙고백이나 실질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죄의 고백들이 있었지만 이번 주일 저녁 집회는 모든 것이 차단된 것 같았고 집회는 죽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국인 형제들도 우리 선교사들과 같은 느낌을 가졌고, 주일 저녁은 참으로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월요일 낮 집회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며 소리를 높여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월요일 저녁에 축복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날 하루 종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도하면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저녁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갔습니다. 우리가 장대현 교회 예배당에 다다랐을 때에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짧게 마친 후에 우리는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했고, 모든 청중이 이에 동참했습니다. 설교를 짧게 마친 후에 우리는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했고, 모든 청중이 이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성기도는 이번 집회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였습니다. 기도 후에 자복이 있었고 그 후에 찬송을 부른 후 인도자는 회중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후 집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집에 가라고 하면서 원하는 사람들은 남아서 아침까지 우리와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500명 내지 600명 정도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예배당의 한쪽 날개(남자석)으로 모아 놓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제껏 경험 해 보지 못한 집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드린 후에, 소리를 내서 죄를 고백했는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곳에 모인 회중에게 강림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회중이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내어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복하였는데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과 번민으로 마룻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주먹으로 땅을 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집 요리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애쓰다가 그러는 중에 자복 하고 기도실 맞은편에 있던 내게 소리쳤습니다.
"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나에게도 희망이 있습니까? 나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리고 그는 바닥에 자신을 내던지고 울고 또 울었는데, 극심한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가 죄를 고백하면 즉시 전 회중이 통성으로 기도했는데 수백 명이 회중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는 그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죄의 고백이 이어진 후 회중들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울고 기도하는 식으로 집회를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장대현 교회의 중진, 특히 강씨(강유문)와 김씨(김찬성)가 서로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우리 몇몇 선교사는 집회 기간 동안에 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화해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드디어 월요일 밤 강씨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얼마나 김씨를 싫어했는지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처럼 당당하고 완고했던 강씨가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이 얼마나 김씨를 싫어했는지 말하려고 애쓰다가 다시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새벽 2시쯤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배당이 점점 추워졌고, 또한 저녁 집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집회를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요일 저녁 기도 집회 때 우리 선교사들은 전날 저녁에 있었던 놀라운 집회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고, 화요일 저녁 집회에는 더 위대한 축복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월요일과 마찬가지 형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한국인 목회자 중에서 가장 은사를 많이 받은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끝난 후에, 원하는 사람은 모두 집에 가도록 했는데 또 다시 600명 정도가 남았습니다. 화요일 집회는 월요일 저녁 집회와 거의 똑같았지만, 집회 중에 나타난 역사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우리 몇몇 선교사는 교회 중진, 특히 김씨(김찬성)와 주씨(주공삼)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두 사람이 자백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화요일 저녁 집회는 김씨가 힘을 얻어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을 때 정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강단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곧 바로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씨는 마음 속으로 다른 형제, 특히 블레어(W.N. Blaire) 선교사를 미워하였음을 자백했고 그러한 미움들을 모두 쏟아냈습니다. 김씨가 겪었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마치 발작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자복했을 때 모든 회중은 온통 눈물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그들은 울고 또 울고, 계속 울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도 그들과 같이 울었는데 아무리 해도 그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전 회중이 눈물 흘리며 울고 있을 때 강씨가 기도하기 위해 나왔는데, 그는 속속들이 자복했고 마치 자기 심장을 찢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제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에게 팔을 올려놓자 그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 강씨는 김씨에게로 가서 사랑스럽게 그를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김씨는 정신이 들자 블레어 선교사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
블레어 목사님,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블레어 목사님도 기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버지!"라고 한 후 한두 마디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미 형용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회중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전혀 멈추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회중이 잠잠해지도록 찬송을 불러야만 했는데, 그 중 몇 사람은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 회중은 잠잠해졌고, 다시 죄의 자백이 시작되어 집회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날 저녁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숭실대학교 학생이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백할 것을 요청했고 기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 학생은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도는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완전히 벗겨지는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간음과 미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일과 지금은 잊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죄들을 고백했습니다. 그 학생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거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가 울자 다른 회중들도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마치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집회로 겨울 사경회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 집회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이제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쁜 것은 수요일 저녁 4개 교회로 나누어 가진 기도회에서도 동일하게 강력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전에 수요일 저녁 집회 때 장대현 교회 장로 두 명을 선출하겠다고 공고한 바 있었는데, 예배를 드리는 도중 그날 저녁 장로를 선출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날 밤 장로로 선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를 짧게 마친 후에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남은 교인들이 자리를 잡자 우리는 함께 통성으로 개도했고, 그 즉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몇 명이 자백한 후 주공삼 장로가 용기를 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집회는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그 놀라웠던 화요일 집회 내내 주 장로는 자리에 있었는데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주 장로가 사람들 앞에서 자백해야 할 끔찍한 되가 있음을 확신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강단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내 옆에 섰는데 그것을 본 나는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주 장로가 굴복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깨끗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 장로는 더듬거리며 자백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점 또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자 그의 모든 죄가 드러났습니다. 주 장로는 간음과 교회 돈을 횡령한 죄를 자백했는데 이를 자백하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 휩싸인 듯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보아 온 적 중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에 사로잡힌 인간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는데 그가 강단에서 떨어질 것 같아 나는 그들 두 팔로 붙들어 주어 서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음 속에 두려운 고통을 느끼면서 주 장로는 소리쳤습니다.
"
이제껏 나보다 더 끔찍한 죄인이 있었습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손으로 온 힘을 다해 설교 단을 내리쳤습니다. 마침내 그는 바닥에 누워 용서를 구하며, 고통 가운데 몸을 비틀고 또 비틀었습니다. 주 장로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곧 죽을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그것은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 그러자 한국인 형제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그를 끌어안고 번민으로 고통 받는 그를 위로해 주었는데, 그 장면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주 장로가 자복하자마자 전 회중은 울음을 터트렸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또 울었고, 전혀 그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찬송을 불러야만 했습니다. 집회를 조금 더 가진 후에 모든 교인이 해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에 있음을 감사 드렸고, 주 장로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도록 만든 성령의 능력을 그가 받아들이도록 이끄신 것에 더 감사를 드렸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성숙한 소녀와 부인들을 위해 설립한 숭의여학교에서도 똑같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교장인 스눅(V.L. Snook)양은 평소처럼 학교에 갔고, 1교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0시에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 날은 정규 예배가 없는 날이었습니다. 짧은 설교와 기도를 드린 후, 여학생들은 고꾸라져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는12시를 넘긴 후에도 기도와 눈물, 그리고 죄의 자백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금요일에는 모든 수업을 뒤로 미루고 아침 내내, 그 이전 이틀 동안과 마찬가지 형태로 집회를 가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장대현 교회 부속 숭덕학교에서도 똑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교는 여느 날과 같이 시작 되었지만 어디에서도 수업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후 1시까지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 중 세 명은 집회가 집행되는 동안 자제력을 잃고 극도의 긴장감에 쌓여 정신을 잃었습니다. 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인 교사들은 그러한 긴장감을 어떤 식으로 적당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요일 오전에는 성령이 어린 소녀들이 다니는 숭현여학교에도 내렸습니다. 우리 선교사들 중 일부가 학교 교실 옆을 지나던 중 비통하게 우는 소리를 듣고 그곳에도 똑같은 성령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사 베스트(M. Best) 양이 즉시 학생들을 돌아보기 위해 갔습니다. 그 소속을 들은 번헤슬(C.F. Bernheisel) 부인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기 위해 시내에 있는 여학교로 내려갔습니다. 번헤슬 부인이 여학생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전하자 그 즉시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요일 정오에 우리가 드린 기도회에서도 똑같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평소에는 30분 가량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날 우리는 2시까지 기도회를 계속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그러한 기도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임하셨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를 공격적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려 노력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남자 사경회가 열리는 기간 내내 여신도들도 다른 곳에서 독자적으로 집회를 가졌는데 여성 집회에서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을 위해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집회 중에 몇 명이 죄를 형식적으로 고백하고 독선적인 노파가 일어나 두서없이 몇 마디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 자리에서는 성령께서 힘 있게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요일 밤이 되어서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고, 여성들도 남성들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를 자백하면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한 젊은 소녀의 자백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는데, 그는 오랫동안 우리 모두에게 고통과 안타까움을 안겨주건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밤 그 소녀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마치 사진의 심장이 부서진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주일 오전, 장대현 교회에서 우리는 평소와 같이 성경 공부 반을 열었고 오후 예배 때 또 다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길선주 장로가 설교했는데 그는 아주 생생한 연극으로 설교를 끝냈습니다. 그는 줄로 자신의 허리를 동여맨 후에 교회의 임원 중 한 사람에게 줄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단 저편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매큔(G.S.McCune) 선교사에게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 자세로 길선주는 죄에 매인 죄인이 그 죄를 끊고 하나님께로 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이렇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기 몸을 움직이려고 애쓰고 몸부림쳤습니다. 마침내 줄이 끊어지고 그는 강단을 향해 돌진하여 매큔 선교사와 서로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습니다.
나는 블레어 선교사와 함께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러 가서 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매큔 선교사가 후에 들려주기를, 길선주 장로가 줄을 끊으려고 몸부림치자 전 회중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줄이 끊어지고 길선주와 매큔 선교사가 서로 끌어안자 그 효과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답니다. 수많은 남자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고, 다른 이들은 극심한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마룻바닥에 몸을 내던졌답니다. 길선주 장로는 교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저녁 집회 때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에는 여성들을 위한 집회만 열렸는데 또다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집회의 긴장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한 여성은 의식을 잃었고 다른 이들도 거의 통제력을 잃을 뻔했습니다.
평양 사람들을 모두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던 집회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평양 밖에 있는 시골 지역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블레어 선교사와 나는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고 막 돌아왔는데, 이 사경회에서도 평양과 동일하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자신의 죄로 인한 엄청난 고통과 그 죄를 자백함으로써 얻은 엄청난 기쁨과 평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시작된 이 은혜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고, 우리가 평양에서 본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는 위해 준비 하시고, 우리뿐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위해 준비하신 위대한 축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올려 두리며, 주님의 이름이 영원, 또 영원히 영광을 받으소서.

[
출전:G.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Mar., 1907] 번역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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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로제타 홀 선교사는 43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하였으며, 평양에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과 한글용 점자개발, 어린이 병동설립, 서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 설립(현재 고려대 의대의 전신), 동대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인천 기독교병원, 인천간호보건대학 등 설립, 또는 시작했다. 또 한국의 최초여의사(서양의학), 박점동(에스더 K.박)을 키웠고, 한국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도 일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미국여성 200인 중 한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선교사의 꿈을 갖다

 

  
 
 
 
 

로 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 9. 19~1951. 4. 5, 한국명 허을(許乙))은 미국 뉴욕 주 셜리반 카운티에 있는 리버티(Liberty)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셔우드(R. Sherwood)와 어머니(P.G. Sherwood)의 딸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체이스넛리지학교와 뉴욕의 오스웨고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얻어 1년간 체이스넛리지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이런 평범한 교사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 때 그 지역에 방문한 미감리회 토번(J.M. Thoburn) 감독과 그의 부인이자 의사인 챈들러(K. Chandler)의 강연 중 ‘인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의료선교’라는 말에 감동 받아 의료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됐다. 그녀는 1886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1889년 졸업했다.

 

조선의 의료선교사로 파송되다

 

로 제타 선교사는 졸업 후 감리교 여성 자선의 집(The Methodist Deaconess Home)에 지원하여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선교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바로 그의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을 만나게 된다. 둘은 1889년 8월 약혼하고, 함께 의료선교사로 활동할 것을 약속했다. 로제타는 처음에 중국 의료선교사로 가려 했으나 하워드의 후임으로 조선에 나오게 됐다.

 

그 무렵 하워드(M. Howard)에 의해 한국에서 시작된(1887)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이 하워드의 건강 악화로 1889년 귀국한 이후 중단 상태에 있자 한국의 선교사들이 미국 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급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1890 년 8월22일 고향 리버티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로 떠나 18일 만에 요코하마에 와서 고베, 나가사키를 거쳐 10월 10일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의 광경을 고향의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제2의 고향이 될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언 덕과 산들은 구불구불하고 가파르며 바위가 많고 거의 불모지와 같았습니다. 부산은 일인거주지였습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마치 그림과도 같습니다." 다시 부산을 출발해 10월13일 제물포에 상륙,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정동에 있는 스크랜턴의 집에 짐을 풀고 얼마 후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으로 숙소를 옮겼다.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 첫날 4명의 환자를 시작으로 열 달 동안 2천명 이상을 치료했다.

 

한말 셔우드가 보여준 의료기술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맹장수술을 할 때는 세인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환자들이 죽음 일보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얻고 기쁨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 많았다.

 

결혼과 남편의 순교

 

1889 년 윌리엄 제임스 홀과 약혼한 로제타 선교사는 1892년 6월27일에 조선에서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것이 조선에서 있어진 최초의 서양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1894년 남편이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자 그녀도 평양으로 갔다.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치료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그 해 청일양국 군대의 혈전장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로제타는 남편과 함께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활약했다.

 

이 때에 신변을 걱정하여 감리교 선교부 서울본부에서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닥터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계속 머물며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에 감염 돼 1894년 11월24일 순직 양화진에 묻히고 말았다. 로제타와 결혼 2년 5개월 만의 일이었다.

 

로제타 홀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고 회고했다.

 

조선으로의 귀환, 딸의 죽음

 

남편이 죽은 후 그 해 12월 로제타 홀에게는 셔우드 홀이라는 두 살 난 아들과 뱃속에 7개월된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출산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딸 에디스를 출산한 로제타는 귀국하기 전 로제타는 남편의 유산과 친지들의 부의금을 모아 한국에 보냈고, 결국 1897년 1월에는 홀의 유업을 기리는 홀기념병원(또는 紀忽病院)이 평양에 건립됐다. 폴웰(E. Follwell) 박사가 이를 인수 경영하였다.

 

이 병원은 개원한 지 일년도 안 되어 3천명이 넘는 환자가 진료를 받았다. 그 해 11월 다시 조선에 돌아온 로제타는 서울의 보구여관을 맡아 보다가 1898년 5월 평양으로 파송 받아 평양에서 여자병원인 광혜여원(廣惠女院)을 설립하였고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병 원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또 한번의 비극을 맞이하는데 딸이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딸의 시체를 김창식 목사의 등에 업힌채 평양서 양화진까지 걸어서 묻었다. 로제타는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며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때 미국에 있을 때 들었던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암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떠올리며 선교의 결의를 다시 한 번 다졌다.

 

의료선교의 선구자적 역할 감당

 

  
 
 
 
 

당 시 조선 부인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의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메타 하워드 여자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고 한국 최초 부인병원인 보구여관(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메타 하워드 의사에 의해 1887.10.20.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졌으나 그녀는 2년 만인 1889년, 건강상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했다.

 

후 임으로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Miss. Rosetta Sherwood, M.D.)가 부임해 온 것이다. 그녀는 오자마자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힘으로’라는 표어를 내어걸고 의료사업과 함께 여성들을 모아놓고 의료강습을 시작했다.

 

홀 부인은 한국인 조력자 박 에스더(박점동)와 함께 평양 일대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의료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이 후 홀 부인은 자녀와 조력자였던 박 에스더를 데리고 미국에 돌아간다. 거기서 박 에스더는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가 된다. 1897년, 홀 부인은 남편의 순교지인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의료선교를 재개했다.

 

후 에 미국에서 의사가 된 박 에스더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들은 또 다시 평양에서 힘을 합치게 된다. 과거에 박 에스더는 미숙한 조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동역자였다. 그래서 이들은 광혜여원의 건물을 신축해서 한국 최초의 간호원 양성소를 열었다.

 

그의 이러한 수고가 인정이 되어, 1908년 4월28일에는 7천8백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종황제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 에스더는 1910년 폐침윤에 걸려 34세를 일기로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그 녀는 의료계의 귀중하고도 획기적인 사업을 두 가지를 시작했다. 첫째는 간호원 양성이고, 둘째는 여자의학반의 창설이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여성의료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보구여관 구석방에서 간호원 지망생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박에스더가 첫 학생이었다.

 

한 편, 그녀는 병원에서만 환자를 돌보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산골민을 위해 지방순행을 하였다. 안주, 운산, 의주, 때로는 청천강을 건너 운산 저쪽의 깊은 산골짜기까지 안 다닌 곳이 없었다. 말에다 각종 의약품과 치료 후에 줄 복음서 및 실용품 등을 싣고 벨을 울리면서 여행하였다. 마을마다 대환영을 받았으며 오는 환자들을 친절히 치료해 주고 약을 주고 싸매 주었다.

 

밤 에는 노블 선교사와 동행해 동리 사람들을 주막에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 1906년 광혜여원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2년 후 새 건물을 마련했다. 1917년 서울로 자리를 옮겨 보구여관의 후신인 동대문부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 의사 겸 약제사로 활약했고, 1920년경부터 여자의학반을 조직하여 한국인 여자의사 양성을 시작하였다. 이 의학반은 1928년 경성여자의학교로 인가를 받아 정규 의학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후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그 녀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관장하며 아들의 해주 구세병원 및 해주 구세요양원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33년 구세요양원 내에 그녀의 이름을 딴 로제타기념예배당이 건립됐다. 1935년 건강이 쇠하여져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1943년 은퇴하고 뉴저지에 있는 안식관에 들어가 말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1951년 4월5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녀의 유해는 화장되어 남편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죽어서도 조선을 잊지 못한 그녀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쓴 남편의 전기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1897)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 상황 및 구한말 국내정세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최초 점자책을 펴내다

 

처 녀 때 본국에서 맹인용 점자사용법(New York Point)을 배운 적이 있는 그녀는 평양에서 의료사업을 할 때 오씨라는 보조원의 어린 딸인 봉래가 앞을 보지 못하므로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후 본국에 가 있는 동안 뉴욕의 맹인연구소를 방문하여 점자법을 좀 더 세밀히 연구하였다.

 

이 때 연구한 점자법이란 뉴욕 포인트 시스템(New York Point System)에다 한글을 적용하여 한국인 맹인들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것을 위해 몰두했었다. 1897년 광혜여원 방 하나를 내어 자신이 고안한 점자사용법을 이용하여 봉래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이 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실시한 맹인교육이었다. 봉래를 시작으로 지방에서 데려온 학생들을 모아 마가렛병동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평양맹아학교가 되었다. 1908년까지 하다가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다음해부터 맹인 전문가인 록웰 씨에게 인계했다.

 

1922 년 9월 환갑을 맞은 그녀의 생일날 내외빈과 신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참석한 한국식 잔치가 한국인들의 극진한 배려로 베풀어졌다. 환갑을 맞이하여 많은 기념사가 있었는데 가장 아낌없는 찬사는 불행한 맹인을 위한 교육과 여성 의학교육이었다. 마지막에 장내를 눈물로 감격시킨 선물은 그녀의 은혜를 잊지 못한 맹인 여성이 그녀가 가르쳐준 뜨개질로 손수 한복을 짜서 선물한 것이다. 이 여성은 그녀가 학교를 세울 때 거기서 배운 학생이었다.

 

1898년 그녀가 편찬한 현재 최초의 점자책은 대구대학교 점자도서관 2층에 전시되어 귀중한 자료로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교의 피

 

서 울에서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J. Hall)과 어머니 로제타 홀(R.S. Hall)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 11. 10~1991. 4. 5, 한국명 하락(賀樂))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다. 어린시절 그의 놀이 상대는 거의가 조선아이들로아이들에게서 조선놀이를 배웠고, 그들처럼 행동했으며, 사고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13 세 되던 1906년 8월 원산의 캐나다 의료선교사인 하디(R.A. Hardie)를 초청하여 평양의 남산현교회에서 예배하던 중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도 저분처럼, 아니 우리 부모님처럼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리라." 하디의 설교는 어린 셔우드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1900 년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 주의 마운트허몬학교에 입학, 1915년 졸업하했다. 같은 해 오하이오 주에 있는 마운트유니온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셔 우드는 서울과 평양에서 자라면서 한국인이 결핵으로 젊은이와 어린이들까지 죽는 것을 보았고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캐나다의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흉부질환과 폐결핵을 전공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졸업 1년 전 같은 의과대학 출신의 산부인과 전공 여의사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1922년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1926년 4월19일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다. 부부는 곧 해주 구세병원(일명 노튼기념병원)에 부임해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또한 해주 남학교인 의창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이 엄청난 책임 앞에 셔우드는 깊은 고독감과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때 마음속 깊은 데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너는 지금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주님이 도와주시고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이 순간 그는 자신을 얻었고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여러 방면으로 모금운동을 하면서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결핵요양원 설립을 추진해 어머니와 선교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어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건립하고 1928년 10월27일에 헌당식을 거행 했다.

 

또 한 요양원 안에 결핵위생학교를 설립, 결핵퇴치를 위한 제도적인 교육도 실시했다. 1930년 6월27일 그는 아내와 함께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선교부의 소개로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씰의 창안자 비셀(Emily P. Bissell) 여사를 만나 크리스마스 씰 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왔으며 총독부 당국의 협조를 얻어 1932년 크리스마스 때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했다.

 

또 한 그는 구세병원, 구세요양원, 결핵위생학교, 해창학교 등 여러 기관의 책임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부모의 뒤를 이은 2대 의료선교사로 특히 한국 결핵의 퇴치와 예방사업에 20여 년 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33년에는 구세요양원 안에 어머니의 업적을 기리는 로제타기념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1938 년 두 번째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갔다가 1939년 가을에 돌아왔으나 국내 사정은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선교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40년 8월 일본 경찰은 그에게 범죄자란 누명으로 10월 재판에서 3년 징역형 또는 벌금 5천 엔을 선고하였다.

 

그 는 결국 병원 일을 한국인 의사 문창모에게 맡기고 1940년 11월 한국을 떠나야 했다. 선교본부의 명으로 인도에 부임하여, 파키스탄 접경인 마다(Madar)에 있는 마다 유니온요양원에서 23년간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크리스마스 씰을 시작하였고 결핵퇴치운동을 하였다. 1963년 은퇴한 후 인도 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귀국 길에 한국에 들러 대한결핵협회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은 퇴 후 캐나다에 머물면서 자선의사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4년 11월3일 셔우드 홀 내외가 꿈에도 그리던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자 곧 양화진의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기자회견ㆍ환영리셉션, 11월7일 보사부장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1월10일 출생지인 서울에서 91회 생일잔치를 대한결핵협회 주최와 많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치렀고 11월 11일 캐나다로 귀국하였다. 1991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그 가 1978년 쓴 회고록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는 홀의 가문과 한국 선교 업적 및 일제시대 의료선교와 교회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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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역사 개략

한국선교역사120년
 

1884 년 일본주재 미 감리교선교사 맥클레이가 입국해 고종을 알현하고 의료 및 교육 사업 실시에 대한 선교허가 받는다. 9월 미국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이 한국 주재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로 내한한다. 이후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중상 입은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완치 시켜 왕실의 호감 얻어 선교에 큰 도움을 받는다.

1885년 4월 5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인천에 입국해 본격적인 한국 개신교 선교를 시작. 4월 10일에는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 설립(국립 병원으로 설립, 후에 재중원으로 개칭함)되고, 8월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 학당을 설립한다. 같은 해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톤은 9월에 정동 제일 병원을 개설 한다.

1886 년 5월말 여성 선교사 스크랜톤이 최초 근대의 여성교육 기관인 이화학당 설립함으로써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7월 11일 노 춘경, 일명 노도사라 불리 우는 그는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 한국 내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887년 1월 서 경조, 최 명오, 정 공빈 등 3명이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 받고 9월 27일 로스와 한국인 신자 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그 해 10월 서울로 입성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 교회로 정동 제일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1889년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 여행 중 서북 지방을 순회 전도하면서 의주에서 김 이련, 김 관근 부자 등 의주 교인 33명에게 이른바 요르단 강 세례를 주었다.

1896 년 최초의 기독교 학생 운동체인 협성회가 서재필에 의해 조직되었다.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 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 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1897년 10월 신앙 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감리교 엡윗청년회가 조직되었다.

1899년 4월 미국 실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과 아펜젤러 의사의 노력으로 세브란스 병원 설립이 설립되었다.

1901년 5월에는 미 감리회의 김 창식, 김 기범 등이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3 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성서 번역 위원회의 참석차 목포로 가다 선박 충돌사고로 순교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반 기독교 운동에 대해 교회는 변호와 적극적 사회 운동을 추진하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인 YMCA가 게일 선교사에 의해 창립되었다.

1904년 9월 남 감리회에서 김 흥순을 감리교 최초의 전도사로 허가하였다.

1906년에는 4월 평양 길 선주 목사에 의해 새벽 기도회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1908 년 3월 한국인 목사 길 선주의 주례로 세례식 거행되어 한국인 목사로서는 최초로 201명에게 세례 주었다. 또한 남 감리회와 간도 선교회를 조직하여 이 화춘 선교사를 북간도에 파송 하였고 10월에는 호가르트 정령 내한으로 구세군을 한국본영 창설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구세공보가 창간되었으며, 점점 식어 가는 부흥 기운을 되살릴 수 있는 새 계기를 마련키 위해 전국적으로 백만명 구령 운동이 일어났다. 9월 장로교의 최 관흘 목사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이 선관 여사를 제주도 여성 선교사로 한 석진 목사를 동경 유학생 선교 목사로 파견하였다. 10월에는 구세군, '구세신문' '구세군가'를 발간하였고 사관 학교 설립하여 선교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1911년 3월에는 성결교의 '복음가', 안식교의 ‘찬미가’가 발행되었고 4월에는 구약성서 발간으로 성경전서 완역이 간행되었다.

1914년 1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브라운 리가 한국 최초의 유치원인 이화 유치원을 개원한다.

1919 년 3월 1일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한 관계로 극도의 탄압과 피해를 입으며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금주 동맹회 절제 운동과 수원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사건이 발행한다. 이로 인해 재암리 주민 30여명이 학살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김 활란 전도단이 창립되었고 5얼에는 YMCA, 평양 신의주, 성진 등 지방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6월에는 감리교 중심의 금연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1년 5월 29일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기독교 증험론을 발행하였고, 6월 14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기독교 감리회에서 여 목사의 안수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33년 1월 20일에는 기독교 감리회의 면려 회보와 감리 회보가 발행되었다.

1934년 6월 한국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식을 배재 학교에서 대규모 기념 행렬로 거행하였다. 또한 10월에는 장로교 선교 50주년 기념 대회 개최하였다.

1938 년 신사 참배 강요로 교회 수난이 심화되었고 기독교계 학교들이 계속 폐교되었다. 2월에는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신앙 수호 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주기철 목사가 평양감옥에 구금되고 장로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9월 10일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항거 끝에 주기철 목사는1944년 4월 21일금요일밤 9시에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1946년 38선 이북에서는 공산당의 기독교 박해 시작되었고 9월에는 KNCC(한국기독교 연합회) 창립 되었다.12월에는 연희대학 ·이화여대, 종합대학으로 승격. 서울 신광 여 * 중고 등 많은 기독교계 학교 설립되었으며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됐던 많은 학교들도 재 개교하였고 기독교 교육 진흥의 기틀이 되었다.

1948년 4월 20일 김 양선 목사가 교회사 자료를 수집 하여 한국 기독교 박물관을 남산에 개관하였고 KSCF(한국기독교 학생 전국 연합회)창립, KNCC라는 기독교 방송국 설립 준비가 이루어졌다.

1952년 12월 15일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가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1957년 11월 1일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를 김 곤준 목사에 의해 창립하였고 전국에 모든 대학 캠퍼스에 전임 강사를 파송하여 활발한 전도와 제자화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1984년 8월 15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개신교 백 주년 선교 대회 예배를 드렸다.

1989년 4월 28일에는 교계 원로 목사 10명의 제창으로 각 교단 증경 총회장 및 기관단체 대표들이 함께 회동, 기도회를 갖고 창설을 협의하여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를 설립하였다.

2000년 8월 14-18일 한국 세계 선교 협의회(KWMA)의 주최로 2000년 세계 선교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Mission Possible/한국선교역사 | Posted by lamie 2007. 10. 17. 12:59

한국 초기 선교사들

한국기독교역사(초기 한국선교사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조슈아

1.머리말

조선! 꼬레아!(Corea!) 한국은 120년전(1885년)만 해도 동양의 숨겨진 작은 나라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누구와도 통상을 맺지 않고 혼자만의 고립가운데 갇혀있었다.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작은 나라였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열강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주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수구파와 개화파등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싸움의 위기상황가운데 있었다. 그로부터 1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규모 10위안에 드는 나라, OECD회원국, 선교역사 120년만에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세계50개의 대형교회중 25개이상이 한국에 있으며, 인구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0%가 넘는 세계에서 비슷한 류를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특이한 나라로 인식된다. 최근의 한류열풍은 언론의 플레이가 아니며, 중국에서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열풍이다.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언론과 생활속으로 파고 들었고, 삼성 LG는 부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온 민족이 하나되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준 짜릿한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다. 얼마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줄기세포 분화에 성공한 서울대 황우석 박사의 뉴스에 온 세계가 요란했다.

중국으로부터 늘 영향을 받기만 했던 힘없던 한국이, 36년이라는 일제식민지배를 경험하며 고통가운데 눌렸던 이땅이,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민족상잔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 한국이 어떻게 오늘날 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기독교가 한국사회, 경제, 정치, 교육, 문화등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넘어선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가 많이 세상과 불의와 타협하여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하다만.. 초기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와서 생명을 바친 많은 외국의 선교사들, 이 땅의 사역자들.. 그들이 땀과 피를 흘려 헌신한 기초위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세워졌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과 생명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다.

오 늘 이 시간에 우리는 한국에 어떻게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 땅에 와서 생명을 바쳐 일하며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과 죽음의 이야기들과, 또 복음을 들은 이 땅의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며 애썼는지, 그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 오늘날의 우리의 현재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 짧은 시간안에 한국기독교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어서 1910년 한일합방이전까지에 focus를 맞추어서 나누려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보면서 이 땅에 온 초기선교사들과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둔해 있던 조선을 세우셨는지, 어떻게 복음으로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부흥케 하셨는지 참 기가 막힌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서 함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늘 몇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대별로 정리해서 나누려고 한다. 주님께서 동일한 감동과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2.복음의 씨앗을 받다

-기독교가 처음에 어떻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1.경교와 2.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그리고 3.최초의 순교자 토마스선교사를 살펴본다.

635. 네리우스파 동양선교 시작함.
한 국이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 시기를 잡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중국 당태종때 베리우스파는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 1세기(100년) 이상 왕성하다가 쇠퇴한다.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서안 비림박물관에 대진경교유행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 한국으로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주 불국사지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를 통해 경교의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이 언급되어진다.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등 대부분의 불교유적에 경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사진-서안 경교비)(사진-경주 돌십자가)


1832.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 네덜란드선교회).

-1832 년 영국 암허스트 호 통역 겸 의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한다.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하며 주민들과 접촉하다.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주며 주민들에게 약과 전도문서등을 전했다. 관리들이 이를 금지시켰다. 한달간 정박한후에 외국과 통상할수 없다는 통보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했다. 항해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당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귀츨라프의 방문이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씨를 뿌리는 수고와 간절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사진이 참 멋있지 않냐? 그 당시에 먹을 게 없었는데 그가 심은 감자가 유용하게 음식으로 쓰여졌다 전해진다.(사진-귀츨라프,기념교회)


1866. 한국최초의 기독교순교자  -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 귀츨라프가 한국을 다녀간 지 33년 후, 토마스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토마스는 중국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부인이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선교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해관통역업무를 보았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한국에서 온 두명의 천주교신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전해줬을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선교를 소망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달 반의 한국선교여행(황해도)을 하게 되고 성경배포를 하였다. 주민들이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1866년 미국의 무장된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무장된 상선이었기에 병사들의 폭탄에 의해 좌초되고,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갖고 있던 성경을 한권 한권 뭍으로 던졌다. 토마스와 일행들은 뭍에 끌려내리게 되고 군인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27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한다. “오! 하나님,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훗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사진-토마스,토마스의 무덤)

그 때 성경을 받은 병사가 훗날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교회의 초대장로가 된 박춘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사진-박춘권)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하나님의 일은 결단코 성취되어진다.

1933 년 9월14일에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제너럴 셔먼호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보복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어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얼마후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교회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국제간의 통상등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어쨌든 이로써 조선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어떠한 열매도 없었지만 분명히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진-토마스기념교회)

3. 기독교의 자주적 수용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나라가 기독교를 접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복음이 들어오게 되고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며, 성경이 번역되어진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솔내교회)가 세워진다.

1885.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라게 된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주민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들른 일본에서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이 벌써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와 멕킨타이어선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서상륜등 한국사역자들,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이수정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사역자들과 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이미 세워지고 번역되어서 한국으로 먼저 들어왔다. 한국은 기독교를 자주적이며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다른 나라는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처럼 이용되었다.

1887.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젼서출간- 존 로스, 멕킨타이어 선교사

- 토마스에게 한국선교를 주선했던 윌리암슨이 토마스의 순교이후에 스코틀랜드교회에 선교사파송을 요청하고, 로스와 매킨타이어선교사가 중국으로 오게 된다. 위리암슨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서공회 총무로서 토마스선교사에게 한국선교를 도전했던 선교사였다. 이처럼 한국선교를 위해 숨은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윌리암슨은 로스에게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사실을 알려주며 한국선교에 대해 도전하게 되고 1874년 로스선교사는 고려문이라는 청과 조선의 국경으로 가서 한문성경을 배포하였지만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한 상인이 찾아와서 그에게 성경을 전해주게 되고, 훗날 그의 아들인 백홍준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오늘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진-존로스)

-1876년 2차 고려문여행에서 의주청년 이응찬을 만나게 된다. 그와 함께 만주로 돌아와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교재 'Corean Primer'를 발간한다.

-1876 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맥킨타이어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음.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중국에서 형성됨.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내어놓고 믿었다.

-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등의 도움으로 1882년 우리말 예수셩교젼서 누가복음을 출간하고 1887년 마침내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발간됨. "한국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고 로스는 고백한다. 로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국사역자들의 수고가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 ‘로스역’이라 하지 않고 ‘예수셩교젼서’라고 부른다. (사진-예수셩교젼서)

로스의 고백- “최초의 한글성서 발행이 한미조약 공표(1882)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이제 완고한 ‘고려문’이 ‘열린문’이 되면 곧바로 복음이 그 민족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 로스선교사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를 만나게 됨. 서상륜형제는 만주로 홍삼 장사를 하러 왔다가 병이 걸렸다. 메킨타이어선교사는 죽어가던 서상륜을 힘써 돌보아주어 병이 낫게 되고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됨. 서상륜은 의주를 대상으로 전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동생 서경조가 있는 솔내로 내려와서 힘껏 전도하여 당시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게 되어 순전히 한국인들의 힘으로,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솔내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역사상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후에 서상륜은 계속해서 전도하여 많은 이들이 믿게 되자 1885년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온 것을 알고 찾아가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교회와 세례받을 자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때 본국에 보낸 선교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무렵은 씨를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 서경조는 1887년 1월 서울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그 후 그는 성직자의 길을 결심,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한사람이 된다.(사진-서상륜, 소래교회,지도, 한국장로교 최초 목사 7인)

1880 년, 로스선교사는 선교본부에 이런 편지를 썼다. “메킨타이어는 또한 4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작년(1979)에 모두 학식있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도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서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서상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인 솔내[松川]교회 창립자. 선교사. 의주(義州) 출생. 1876년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로스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1884년 국내에서 전도하려고 의주로 돌아와 한국에서 최초의 종교집회를 가졌다. 그뒤 체포령이 내려 황해도 솔내로 피신, 1887년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국내 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당을 세웠다.

서경조- 의주출생. 한국장로교회 최초 7명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78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접하였다. 1884년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로 가, 형 상륜(相崙)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교회를 건립하였다. 1900년 솔내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회합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해서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할 때 다른 6명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백홍준의 일화- 로스는 서상륜, 백홍준등에게 성경책을 짊어지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백홍준이 성경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건너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 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를 통해 10여명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백홍준은 로스가 고려문1차 여행때에 성경을 전해줬던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아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여 백홍준은 만주로 건너가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후 로스와 성서번역작업을 같이 했고, 이후 1887년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함께 초대장로로 추대되었다. 그후로 마펫,게일선교사등을 안내하며 순회전도집회를 다니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사진:백홍준, 매서인-책을 파는 사람-들의 전도)

백홍준- 의주출신. 1874년 만주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영국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J.로스(한국명 羅約翰)와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泰)를 만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체류지인 뉴좡[牛莊]에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쳐 주고 자신은 영어를 배웠다. 1876년 이응찬·이성하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한국어로 옮기는 성서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1887년 H.G.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의 자기 집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창립하면서 서상륜(徐相崙)과 함께 장로로 추대되었는데,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의 전신이다. 그후로도 선교사인 S.마펫, J.게일 등의 안내자로서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이성하의 일화-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속에 국가에서 금지하는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응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속의 교회로 서게 된다. 이성하는 한국인 최초로 세례받은 4인중의 한명이며,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성경을 몰래 숨기고 귀국하여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서상륜의 중재로 압록강에서 행해진 언더우드의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성하-의주 출신. 1874년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와 함께 중국 동북성으로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로스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6 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후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식자공(인쇄공) 김청송의 일화-성경을 인쇄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리고 옛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을 중심으로 쪽복음을 나눠주며 전도하였다. 1884년 즙안에는 75명의 세례받고자 하는 자들이 로스선교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눈이 엄청 내리는 날 로스는 추위를 무릅쓰고 즙안으로 가서 75명 남자에게 세례식을 거행한다.

이 상에서 보듯이 한인최초의 교회의 설립과 흩어짐에서 성서중심적 특징과 자발적 복음수용과 전도라는 한국초대교회의 한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선교사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그들을 불러와서 세례를 베풀게 했던 한인촌과 의주, 그리고 소래의 신자들, 이들에 의해서 자생적인 한국교회는 세워져 나갔던 것이다. 선교사의 역할이 컸지만, 한국인들의 자발적이고 수용적인 복음수용과 전도로 한국교회가 세워져갔다.

1882. 일본을 통한 기독교의 만남- 이수정의 개종

-하나님의 역사는 만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수정은 1882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성경을 접하게 되고 읽으면서 개종하기로 결심하고, 1883년 4월 낙스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전 일본기독교대회에 한국을 대표해서 참석하여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하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일본기독교대회에 참석한 이수정)

-1883. 이수정은 미국교회에 서신을 보낸다. 지난날 한국에서 생명을 무릎쓰고 천주교를 믿었던 이야기를 서두로 얼마있지 않으면 한국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올 것임을 얘기하고 미국교회에 선교사파송을 강력히 요청한 것이다. 다음은 이수정의 편지의 일부이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편지가 미국 선교잡지에 소개되면서 미국선교본부는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임명, 파송하게 된다. 피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를 요청하여 선교가 시작된 예는 선교역사가운데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한국인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복음의 수용에 대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선교사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힘이 되었을까? 사역을 해 보지만, 이런 주도적인 몇 사람을 통해 사역이 힘있게 일어나게 된다.

-1885. 마가복음서를 번역한 이수정. 성서공회 루미스목사와 함께 성경의 한국어 번역에 착수, 이른바 현토(縣吐)성서(한문 성서에 한국식 토를 단 것)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성하고 한글 마가복음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성서로, 같은 해 만주 봉천에서 로스 목사와 백홍준이 만든 누가복음과 함께 최고(最古)의 한글판 성경이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 들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피선교지의 언어로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있음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선교지에 가서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이미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 쉬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한아름씩 들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수정은 또 윤치호등 일본에 온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85년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도쿄 유학생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가 수구파(守舊派)에게 살해되었다. (사진-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이처럼 만주와 일본에서 동시에 일어난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기독교의 수용과 전도, 그리고 선교사파송을 요청하면서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을 준비하였다.


4. 초기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발한 선교사업

-본격적으로 외국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 초기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사역을 살펴본다

-1882 년 토마스선교사를 태운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와서 격전을 치른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그 후 강압적인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으로 간다. 거기에서 민영익은 미감리회의 가우처박사를 만난다. (사진-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

민영익을 만난 가우처박사는 한국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선교를 위해 미국의 선교본부에 편지와 선교비를 보내게 되고 때를 같이 하여 이수정의 선교요청편지를 받으면서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미감리회는 1884년 스크랜튼(Wm. B. Scranton)박사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그리고 스크랜튼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미 장로교회는 1884년 헤론(John W. Heron)을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한다. 뒤이어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한국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한국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선교를 목표로 1883년 선교지로 떠났던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1884.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사진-알렌,광혜원1,2,세브란스병원)
1883 년에 중국에 왔지만 별다른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던 알렌은 한국선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으로 간다. 이로써 그는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선교사가 된다. 알렌은 이후에 벌어지는 수구파와 개화파사이의 싸움인 갑신정변에서 칼에 찔려 죽어가는 왕비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을 살려주면서 왕실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1885년 4월, 왕실은 알렌에게 한국최초의 서양 근대식병원인 국립병원 광혜원을 세우도록 허락한다. 이 광혜원은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미국 실업가인 세브란스의 건축기금으로 현재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알렌은 왕의 어의가 되고, 광혜원은 이후에 들어오는 많은 선교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같이 하나님은 국제수호통상조약이나 국내의 여러사건을 통해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하시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통하면서도 인간이 계획하지 못했던 방법을 통해서 그의 목표를 이루어가셨다.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부활주일에 한국 인천에 입국함.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시작된다. 그래서 1885년을 한국선교의 원년으로 부른다. 아펜젤러는 인천 제물포에 도착즉시 이같이 기도하였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독신이었고, 아펜젤러는 임신중인 아내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현지사정의 악화로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후에 입국하게 되고, 언더우드는 알렌의 도움으로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사진-언,아,기도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7.19~1916) - 미장로회의 첫 번째 복음파송선교사.
(사진-언더우드1,2, 새문안교회, 벽돌교회, 그리스도신문, 언더우드관, 언더우드가계도, 언더우드가족, 언더우드 일가,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 노춘경)


한 국명 원두우(元杜尤). 1885년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한국선교를 결정한후 약혼자에게 한국으로 같이 가자고 했을때 no라고 하자 약혼을 파기하고 혼자서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이후 광혜원 여의사로 온 릴리아스 호턴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벽지순회전도여행을 다녀온다. 잘생겼다. 엘비스 프레슬리인줄 알았다. 1886년, 언더우드에 의해 국내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사도라고 불려지는 노춘경이다. 그는 알렌의 집에 갔다가 책상위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과 책 한권을 몰래갖고(훔쳐서) 집에 가서 탐독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싶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세례를 법적으로 금지하였다. 복음에 불타오르던 언더우드는 다른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푼다. 어느날, 한밤중에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온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로스선교사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고 국내로 들어와서 황해도 솔내에 솔내교회를 세운 장본인이다. 서상륜은 솔내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면서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부탁한다. 그 때 언더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조선땅을 잠자고 있는 땅이요 미개한 나라라고 일렀는가! 누가 조선사람들을 게으른 백성이요 무지한 민족이라 하였는가!” 언더우드는 조정의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몇 개월이 흐르고.. 서상륜은 훗날 한국최초의 7인목사중 한사람이 되는, 동생 서경조를 비롯한 3명을 데리고 언더우드에게 다시 나타난다. “목사님, 목사님이 못오실 것 같아서 세례를 받으러 저희들이 올라왔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담대함을 갖게 된다. “목사님, 솔내에는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서상륜의 요청으로 얼마 후 언더우드는 솔내로 가서  세례를 베풀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세례가 금지되어 있어서 당시 중국영토였던 압록강까지 가서 세례를 집례한다. 70여명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언더우드는 단지 세례만 주었을 뿐이다. 이미 국내에는 자발적으로 믿고 전도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887년, 14명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한국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솔내교회의 서상륜과 백홍준은 새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된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 1897년《그리스도신문》도 창간,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오늘 연세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성서번역위원회를 만들어 한글성서완역하는데 기여하다. 그는 "사람이 일을 아니하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미국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손자,증손자까지 한국선교와 교육등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의 부인 L S 호턴(한국 이름 호돈·好敦)은 광혜원 의사와 명성황후 시의(侍醫)로 인술을 펼쳤고, 언더우드 2세(한국 이름 원한경·元漢慶)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폭로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이 된다. 언더우드3세(원일한)는 선교사요 교육학가로서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총장서리로, 전쟁때에 UN통역으로 한미간 우호증진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얼마전(2002년) 언더우드4세는 지난 120년동안 한국에서 언더우드일가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전부를 조선을 위해 기꺼이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4대의 묘역이 있다. 비문에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고 적혀있다. 기독교기업인 e-land는 언더우드를 기념하여 옷의 브랜드로 만들기도 했다. 언더우드 한사람을 통해 한국초기 기독교와 교육, 사회전반에 걸쳐 많은 변혁과 변화가 있었다. 그 한사람뿐 아니라 그의 아내, 아들, 며느리, 손자, 손자며느리,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이 있다.

언더우드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
(아펜젤러,성서번역자들,조선그리스도회보,동상,정동교회1,2,최병헌목사,배재학당,무덤,비문,전도,엘리스 아펜젤러비문)


1885 년 언더우드와 함께 미감리회 파송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다.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1887년 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YMCA를 설립을 주도했다. 그의 행적은 서울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가 출범하기 전인 4∼5월에는 평양을 답사, 선교요충지임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88년 봄에는 정부의 소환명령으로 중도 포기했지만 언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에 나서 평생 조선팔도중 6개 도에 걸쳐 7천2백리길을 돌았다고 하니 당시 교통사정등에 미루어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1902년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사자처럼 우람하고 여인처럼 우아한가 하면,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드는 정열의 감리교인 아펜젤러. 평생을 두고 이웃만을 섬기며 주님을 증거한 하나님의 사람,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딸인 앨리스 아펜젤러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아버지가 생명을 바친 조선으로 다시 들어와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며 이화여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1950년, 한국전쟁을 넉달 앞두고 66세의 나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설교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고 쓰여 있다. 아펜젤러의 막내도 이화여대 교수로 선교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사적으로, 그리고 교육,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한 1885년을 한국기독교의 원년으로 본다. 지난 1985년에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식을 했다. 그들 당대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 손자,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유별나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 있다.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테네시 의과대학을 개교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학교의 교수로 남아달라는 학교당국의 제안을 만류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땅끝이 어디인지 찾다가 조선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준비한다.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파송을 요청하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1884년 장로교 최초의 조선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일본으로 갔다가 알렌과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한 후에 조선땅을 밟는다. 알렌의 뒤를 이어 2대 광혜원 원장을 맡아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음을 맡는다. “조선과 조선사람들을 더 ..더..뜨겁게 사랑하고 싶소. 그동안 다하지 못한 것...”병원의 조수들,집안일을 돕던 일군들 모두 불러모았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다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죽음을 맞는다. 정부에서는 양화진언덕을 허락해준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처음으로 묻힌다. 양화진은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의 아내와 자녀들도 계속해서 한국의 선교를 위해서 삶을 드렸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미 국 감리회 여선교부 최초의 여선교사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의사인 아들 스크랜톤선교사와 함께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1885년 조선땅을 밟는다. 당시 조선여자는 이름도 없었다. 1886년, 메리 스크랜톤은 1명의 거지여자아이를 시작으로 여자학교를 설립한다. 그것이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이다. 오늘날의 연세대,이화여대등 처음엔 몇 명으로 시작했다. 설립한 이의 비전이 결국 성취되어지는 것을 본다. 스크랜톤의 말이다. “..나는 믿고 있다. 이곳에서 이 땅 조선의 여인들이 인간의 권리를 찾는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바라는 것, 말씀을 믿고 바라는 그것이 실상이 되어 든든한 건물이 세워지고 그 건물속에서 어느나라 여성보다도 당당한 딸들이 늠름하게 걸어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메리 스크랜톤의 비전이 오늘날 성취되어서 이화여대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기독교육에 큰 변혁을 가져온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사진-메리스크랜톤,이화학당,비문, )

스크래톤선교사(Scranton, B. William, 1856-1922)
미 감리회 파송 선교사. 1885년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과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조선땅을 밟았다. 광혜원에서 의료를 했다. 왕립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은 사회 중,상류층을 위한 병원이었다.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계급, 가난한 사람들, 그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조선사람을 향한 병원을 시작한다. 1885년, 세워진 무료병원이 제동병원이다. 고종임금은 스크랜톤의 한국이름인 시린돈의 ‘시’자를 따서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스크랜톤은 상동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의료로, 교육으로 삶을 드렸다. (사진-시병원, 상동병원교회, 알렌과 스크랜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육 영공원교사로, 선교사로 와서 한국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한국이 살아갈 방도는 교육뿐이며, 한국을 정복한 민족(일본)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교육에 전념해야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 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YMCA창설을 주도했으며,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고종의 외교고문, 밀사로 활약하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국전통노래인 아리랑을 서양악보로 적은 사람도 헐버트였다. 태어난지 1살이 지났을뿐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이라는 추모비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는 어록이 있다.
(사진-헐버트,고종의 친서,비문)


셔우드 홀 가족(Sherwood Hall)
아 버지는 제임스 홀이며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하다 일찍 생명을 마감하고, 어머니는 로제타 홀이며 맹인 점자교육의 창시자이며 평양 기홀병원을 세웠다. 한국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길러내었다. 고려대병원의 모체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아들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났다. 의사요 선교사로서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사진-크리스마스 실) 위 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로 첫 해(1932-33)의 남대문과 두번째 해(1933-34)의 미국의 실을 모델로 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소년 소녀의 모습 (사진-셔우드홀,셔우드홀부부,홀과 거지들,평양병원,셔우드홀부부,최초의X-mas 실, 비문) 아버지,어머니,아들,딸,며느리 모두 양화진에 묻혔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1892 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백정해방운동의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 구원받았지만 당시 양반과 서민의 차별이 존재하였고, 특히 백정에 대한 양반의 차별이 대단하였다. 양반출신 교인들은 백정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하여 교회를 분리하여 나가는 일도 있었다. 이에 무어선교사는 교회내의 백정차별을 없애고, 오히려 서민과 백정들을 향한 사역에 헌신하여 서민과 백정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1894년 승동교회를 세운지 4년이 지났을때 세례받은 108명중 30명이 백정출신이었고 1898년 132명의 백정이 세례를 받는다. 1920년 백정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뜨거워져서 40%가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반인들의 자녀들중 5%만이 교육을 받았음을 볼때 대단한 변화였다. 그의 묘비에는 우리말로 “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그리고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라는 기록도 있다.


하디(R.A.hardie)  
-캐나다 YMCA파송 선교사. 의사요 선교사로서 강원도에서 의료개척사역을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함.
-1903 년 원산에서 열렸던 기도회에서 하디선교사는 공개적으로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나는 3년동안 남감리회가 강원도에 세운 교회에서 애써 일해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목사가 또 외국선교사를 미워한다는 것을 회개하였을대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전국 각지로 퍼져가게 되었다. 사역자가 먼저 회개하고 무력함을 고백할 때 그때 인간의 역사는 그쳐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진-하디,길선주,장대현교회1,2, ㄱ자교회, 하디무덤)

이 부흥운동은 한국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만주와 몽고 북경지방까지 확산되었다 한다. 중국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채 30년이 안되어 한국교회는 그 열매를 다시 중국에 전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에도 보겠지만 한국은 짧은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5.초기 한국기독교의 특징

1) 성서중심적 특징 -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성경이 번역되었다. 1887년 만주에서 로스와 서상륜, 백홍준, 이응찬등을 통해 예수셩교젼서가 번역되었고, 1885년 일본의 이수정과 루미스등을 통해 마가복음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권서인,매서인들을 통해 성경이 전달되어지고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변화되게 된다. 이후에 계속되는 부흥에는 항상 성경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에는 ‘말씀사경회’라는 독특한 모임이 있었다. 말씀의 기초위에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는 견고히 세워질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성경이 기초이다.


2)자발적 복음수용과 전도 - 일본에서 이수정의 요청으로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오게 되었고, 인쇄공 김청송의 요청으로 로스선교사가 즙안으로 가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서상륜등의 요청으로 로스, 언더우드가 소래교회로 가서 세례를 베풀게 되는 등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복음수용과 요청으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등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는데 한국인들의 주도로 되어졌다. 1907년 대부흥성회가 있었던 장대현교회는 한석진을 비롯한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복음을 받고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생명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로스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를 다시 보자.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주도적이며 자발적인 태도로 복음을 수용하고 가까운 이들에게로 가서 전도했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3)초기 한국선교사들의 헌신 - 알렌,헤론,언더우드,아펜젤러,제임스홀,스크랜톤,메리스크랜톤,헐버트등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생명을 드린 헌신으로 이 땅에 많은 믿는 자들과 교회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조선을 사랑하여 웨스트민스트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했고, 내 생명이 천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든 생명을 한국을 위해 드리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때로는 한국에 온지 한달만에 죽기도 하고, 아내를 잃어 세 번씩 결혼하기도 하고, 1살된 아들이 먼저 죽어 떠나보내며 아리랑을 부른 선교사도 있었다. 자기들 생명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들 당대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특별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드려 섬길 사람들은 누구인가?


4)짧은 선교역사이지만 선교사를 파송함 -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외지선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독노회 창설로 조직을 정비한 장로교의 첫 사업중의 하나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었다. 이어 1900년에는 한석진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흘 목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선교사로, 이듬해에는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 선교사로 보내 동포선교를 벌였다. 물론 감리교도 만주에 이화춘목사 배성식·손정도 목사 등을 파송했고 기타 교파들도 자체 선교를 일찍부터 벌였다. 산동성선교를 위해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인을 정식 선교사로 산동성에 파송했다. 선교사를 받아들인 피선교지가 이처럼 빨리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역사는 드물다. 로스의 예언이 적중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을 이어 세계 제 2의 선교대국이다. (사진-장로교초대7인목사중 한석진-왼쪽아래,이기풍-왼쪽두번째-을선교사로파송, 이기풍-우학리교회)


5)고난을 통해 순전한 믿음을 가짐
초 기에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걸로 믿어야 했다. 한 사람의 크리스찬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왜냐? 순전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동기가 없었다. 고난가운데 믿음이 순전해졌다. 오로지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민족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주를 섬겼다. 이후 일제식민지기간과 한국전쟁등 특히나 고난이 많은 나라였다. 그 고난을 통해 순전해졌다.


6.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과 죽음(동영상)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 D. 언더우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
-앨리스 아펜젤러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H. B.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

존 W. 헤론(John W. Heron)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광혜원원장, 고종임금 시의(侍醫). 한국체류 5년 33세 별세
-묘비문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제임스 홀, 로제타 홀부부, 셔우드홀
-제임스 홀 : 평양개척 의료선교사. 광성학교 설립.
-“내가 조선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때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
-로제타 홀 : 평양 기홀병원설립. 맹인 점자교육 창시자
-셔우드 홀 :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 펼침
-마펫선교사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한국에 기꺼이 왔고, 다시 명령하매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

W.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1874-1903)
-한달간의 선교준비기간중 천연두로 생명을 잃음
-묘비문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K.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1883-1908)
-1년동안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교사로 재직함. 급성맹장염으로 죽음.
-묘비문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캔드릭의 유언 :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J.A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1897-1956)
-한국 전쟁에서 고난을 극복한 A.k.젠센.
-묘비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J.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1853-1920)
-감리회 첫 여선교사 배화(培花)의 초석 캠벨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D. A. 벙커(Bunker, Dalziel A)
-최초로 애국가 만들고 옥중 전도 시작한 벙커 선교사
-묘비문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


사무엘 F. 무어(1860~1906)
-양반과 천민 신분 제도를 철폐하며, 한국서민을 사랑하여 백정선교에 헌신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Mission Possible/한국선교역사 | Posted by lamie 2007. 10. 17. 12:52

선교사 알렌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 역사

 

 

한국 초기 선교 이해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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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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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윤     탁

(선교신학 박사과정)

   1. 알렌의 일기(槪要)를 통하여 살펴 본 그의 생애(略史)  

   2. 일기에 나타난 시대적 상황과 그가 본 한국인

   3. 선교사 알렌과 그의 선교    

          1) 선교사로서의 알렌           2) 선교사들과의 갈등과 고통

   4. 외교관으로서의 알렌 이해  

 

 1. 알렌의 일기(槪要)1)를 통하여 살펴 본 그의 생애(略史)

 알렌(Horace N. Allen, 1858. 4. 23 ∼1932. 12. 11.)은 구한말 미국의 선교사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한 외교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 자명으로 안련(安連). 오하이오주(州) 델라웨어 출생한 그는 1881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거쳐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의학박사)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1883년 5월 17일) 동급생이었던 메신저(Frances Ann Messenger)와 결혼하였다. 북장로교 외국 선교부 의료선교사로서 중국 상하이(上海, 8월 20일 출발, 10월 11일 도착)에 도착한 그는 그 해 10월 15일 남경에서 의료업을 개업하여 어학 공부를 하였으나 1884년 1월 상해로 돌아왔다. 그 해 알렌은 출산(7월 10일)한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부산을 거쳐(9월 14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 이 날이 9월 29일(토) 이었다.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있으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4.)때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사(侍醫) 겸 고종황제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1885년 1월 22일 대리공사였던 포크를 통하여 병원 설치안을 제출, 2월 20일 승인을 받아 갑신정변에서 참살을 당한 홍영식의 집을 수리하여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였는 데, 4월 9일 개업하였다.2)  4월 26일 고종은 이 병원을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20여명의 관리와 하인을 배치하였으며 이 한 해 동안 스크랜톤(감리교)과 헤론(장로교)의 도움으로 1만 여명을 치료하였는다. 장티푸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 나병등의 악질성 환자가 대부분이었다.3) 1885년 8월 5일 기녀(妓女, Dancing Girl) 5명이 첫 여자 의학생이 되었는 데, 그 이후 동료(언더우드와 헤론)들과 적대감을 가져가면서 추진된 의학교(조선 왕실 병원 제중원 부속 의학교, Medical and Scientific School)가 개교한 것은 1886년 3월 29일이었다.

 

  선교사로서 가장 갈등이 심하였던 시기는 1886년 가을에서 1887년 9월까지였다. 헤론과의 관계 악화로 선교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 알렌은 서울을 떠날 결심도 하게 되지만 선교 본부에서는 거절하게 된다(1886. 10. 10). 그러나 알렌은 오히려 정부로부터는 참판의 벼슬을 가지게 되었고(10월 25일), 술에 빠져있던 포크 공사가 조선을 떠남으로 알렌은 국왕을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1887년 9월 이후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87 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도미(渡美)하게 된 알렌은, 독립국인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대한 청(淸)나라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美) 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다시 내한하여 7년 동안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이 당시의 활동 내용은 <알렌의 일기>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1897년 9월 13일 주한 미국 공사로 임명 이후 러·일 관계와 관련된 외교적인 기록(1897. 9. 14. - 1898. 7. 27.)과 시베리아를 경유한 세계 일주 여행 기록(1903. 6. 1.- 11. 20.)을 일기로 남겨 놓았을 뿐이다.4) 그러나 이 일기에서 알렌은 미국을 다녀온 후 친미당(親美黨)으로 '독립, 독립'을 외치던 이완용이 친로(親露) 행위와 친일파(親日派)로의 변신 내용을 기술하면서 결코 한국 정부의 공직을 갖지 말았어야 할 인물로 평가하였다(1897. 10. 14).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일기 중에는 자신의 음주 사실(1885. 8. 5./ 1903. 6.14.)과 흡연 사실(1888. 1. 13)도 기록하였다.

 

  결국 반일 친노 정책을 역설하던 알렌은 친일·반로정책을 고수하는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정책 마찰로, 외교관인 동시에 선교사로서 음으로 양으로 선교 사업을 돕기도 하였으나 결국 1905년 3월 해임되어, 그해 6월 9일 귀국하였다(당시 나이 47세). 오하이오주 도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일기에 나타난 시대적 상황과 그가 본 한국인

  조선은 오늘날 선교 활동을 벌인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사실상 자신들만의 종교가 없었다. 유교는 섬기는 신이 없는 도덕 규범일 뿐이었고, 불교는 평판이 나빴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본래 매우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인도처럼 종교적 진리를 전파하거나 종교 단체를 조직하는 일을 방해하는 특권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 활동의 길이 활짝 열려 있는 셈이었다. <알렌의 조선 체류기에서>    

 

 

  ' 알렌의 조선 체류기'에 나타난 그의 한국 경험은 신비롭다 못해 흥미로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조선인의 순박한 모습과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 안팎의 실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의사에 눈에 비친 질병과 무지와 빈곤, 외교관의 눈에 비친 혼란과 부패함과 폐쇄성, 선교사의 눈에 비친 미신과 무기력과 나태함…. 그러나 그는 긍정적이고 해학적인, 그리고 흥미롭게 당시의 시대상을 경치를 구경하듯 읽을 수 있도록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나타난 당시 상황은 단순히 흥미로운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의 생활 모습이 직접 그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방시설도 없는 호텔 방에서 구두를 베개삼아 자야 했고, 가족을 데리러 상해로 가는 배에는 거의 모든 남자가 정부(情婦)를 대동(매춘부도 동승)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품행은 충격적이었다(1884. 10. 11). 갑신정변은 알렌이 조선 정부(왕)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민영익의 치료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일기(1884. 12. 5.)에 기록한 그는 대체로 한방 치료를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며(85. 1. 11.) 상대방이 의문을 가질 때는 비교적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85. 2. 21.).

 

  특히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이나 지도적인 인물에 대한 혹평도 빠뜨리지 않았다. 12명으로 구성된 초대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 일행을 인솔하고 워싱턴을 향하는 배에서 쓰여진 일기 중에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심한 악평들을 하고 있다(1987. 12. 26).

 

 

  조선 사절단은 1등석 5장만 가지고 있었지만 나머지 5명은 2,3등 선실에 모여 식사도 같이 하면서 지냈는 데, 어찌나 더러운지 그들이 풍기는 악취를 참을 수 없었다. …

두 사람의 조선인 강진희는 지분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이상재도 더러운 사람인 데, 이 두 사람은 그들의 객실에서 박공사와 함께 식사했다. … 박공사는 사절단 일행 중 가장 나약하고 바보 천치같은 인물이었다. 조선 정부가 정식으로 임명한 번역관 이채연은 영어 한 마디 할 줄 몰랐다. 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은 그래도 전반적으로 조선 사절단의 나쁜 인상을 상쇄, 보충해 주고 있다.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은 선실에서 끊임 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담배 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 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조선 음식 등이 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배 위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어쩌면 알렌이 느낀 조선과 조선인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기 가운데에는 포크 대리 공사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1885.2. 12.),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싸움질한 이야기까지 빠뜨리지 않고 있다(1885. 3. 27.).

 

 

 

 

   3. 선교사 알렌과 그의 선교

      1) 선교사로서의 알렌

    알렌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선교사였다. 당시 한국 상황으로 보아 부득이 주한 미국  공사관부의 무급 의사로 근무하였을 뿐 그는 분명히 미국 장로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였다. 갑신정변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영익을 치료하는 것을 계기로 삼아, 당시의 국법으로는 금교(禁敎) 조치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빈번하게 접촉함으로 선교의 길을 열 수 있는 민첩성을 보였다. 그래서 헤론, 스크랜톤, 앨러스, 호튼 등이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는 자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의 예리한 현장 감각과 판단력을 지녔던 것이다.5) 예나 지금이나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떠벌이식 선교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으로서 알렌이 가졌던 자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뒤따라 들어오는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길(입국할 수 있는 길 뿐 아니라)을 열어 주었고6), 그가 시작한 광혜원과 제중원의학교(1886. 3.29.)는 초기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와 학원 선교로 선교의 문을 열게 된 시초가 되었던 것임을 변명할 수 없다.

          

  알렌은 의사이며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매일 기도하면서 경건 생활(religious observances, 목회가 아님)에 힘썼고(1884.11.12), 추수 감사절 예배를 집전하였다(11.27). 그리고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 예배가 알렌의 집에서 드려졌다. 참석한 사람은 바로 앞날 도착한 헤론부부와 스크랜튼 부인의 언니, 그리고 알렌과 그 아내였다(1885. 6. 21.).

 

  김판서댁의 아들을 치료하였으나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다. …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아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이다"(1885. 3. 22.). 그는 역시 의사였으나 선교사였다.

 

  밖으로는 의사로서 혹은 외교관으로의 직무에 충실한 그였으나 사실은 먼 앞날을 바라볼 때 그는 선교사로서의 사역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가 정력을 다함으로 후배 선교사들을 위한 사역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곧 조선 선교를 용이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2) 선교사들과의 갈등과 고통

    오늘날도 선교지 마다 선교사들끼리 갈등이 없는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알렌 역시 선교사로서 선교사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통하여 시련을 겪게 된 대표적인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일기를 통하여 살펴본다.

 

  언더우드씨는 아주 빈틈이 없는 사람이고 사무적이고 민첩한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오히려 자만에 빠지고 성급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이 성격으로 장차 우리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1885. 4. 6.)

   국왕은 오늘 나에게 말 두 마리를 하사했다. 이 말들은 병원 제중원에서 쓰일 말들인데 나에게 보내진 것이다. 지금 병원 일을 도와주고 있으며 매사에 추악한 방법으로 질투심을 보이고 있는 스크랜턴 박사가 국왕이 내린 말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기가 가지겠다고 나섰다.(1885. 6. 17.)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이 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병원 일을 도울 필요가 없을 때에는 집에 머물러 있든지 어학공부를 하고 있으라는 등 아주 친절한 말씨로 충고했을 때 언쟁이 발생한 것이다. … 이러한 감정 대립이 헤론의 가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게 되었고, 헤론 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내가 선교 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선교부 사임을 구실로 이용, 돈벌이를 나서려 한다고…(1885. 9.1.)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격상 인물평을 했다. 즉, 언더우드는 위선자요 수다장이이며, 헤론은 잘 토라지는 샘꾼이라 평했다.(1886. 3. 29.)

  헤론은 연회석상에서 비기독교적 행동을 서슴치 아니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헤론과 나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886. 9. 5.)  

 

 10 월 10일의 일기에도 헤론과의 관계로 인하여 선교사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자신의 입장과 헤론 부인의 거짓과 허위 편지 작성, 여가를 즐기는 언더우드, 헤론의 나태함 등을 같은 방법으로 힐난하고 있는 일기를 썼다. 선교사들간의 관계 뿐 아니라 민영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치료받은 민영익이 자신을 친형으로 모시려한다는 제안과 그의 성격이 급하다는 글을 썼던(1885. 1. 27.) 알렌은 민영익을 '어른 애기'로 표현하며, 비겁자,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할 자, 이기적인 인간으로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한 자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하였다(1885. 3. 11.). 묄렌도르프나 영국인 허치슨, 파커 공사, 그 외 여러 한국인들도 있으나, 선교 정책으로 인한 갈등 부분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1885 년 6월 28일 일기에서 그는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두 마리의 말과 스크랜턴과의 갈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 논쟁 가운데 "스크랜턴은 병원 사업이 순수한 복음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선교 본부에서도 자기를 이러한 병원 사업에 종사하는 것을 승인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스크랜턴의 주장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사실 이 주장은 당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두 선교사와 알렌 사이의 갈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결국 장로교의 헤론과 감리교의 스크랜턴과 연계되어 "알렌은 누구보다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선교사업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불만으로 나타나게 된다.7)

  1888 년 조선 정부는 금교령을 내렸다. 이와 관련하여 언드우드가 갑자기 선교부와 미국 공사에 의하여 서울로 소환을 당한 적이 있다, 이 때의 상황을 언더우드의 부인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알렌의 선교 방법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한 쪽에서는 일단 종교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최소한 선교지의 발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일 다른 길을 택하면,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곧 바로 추방당할 것이란 이야기였다.…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큰 소리로 …찬송가를 소리쳐 불렀는 데도 가장 비천한 한국인 신자를 비롯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호튼은 대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성당을 지으려한 가톨릭으로 인한 금교령일 뿐임을 강조하였다.8)

  헤론과 언더우드, 아펜셀러와 스크랜턴이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로 교단을 달리하면서도 반(反) 알렌에 대하여는 같은 보조를 취하였다9). 이 일로 인하여 선교 본부에 사의를 표명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돈벌이보다는 선교에 더 열의가 있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새 선교 사업을 시작해 보기 위해 부산으로 전근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885. 9. 1.).  또 스스로 푸념하기를  자신은 "훌륭한 선교사의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하면서 이따금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아둔해지거나 성미 급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1885년5월12일).

 

  4. 외교관으로서의 알렌 이해

      알렌은 한국 땅에 20년 6개월(1884. 9. -1905. 3.)을 체류하였다. 그 중에 선교사로 일한 햇수는 4년이었으며, 14년 8개월은 주한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의 미국 세력 증대가 곧 기독교 선교에 힘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10) 또 선교의 기반을 다짐으로서 머지않아 도착할 목회 선교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궁정, 해운 세관, 병원 의사,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 공관 직원이 되었다고 그의 '조선 체류기'에서 술회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그는 게일(J. S. Gale)이 말한 것처럼 '선교사 명부에서 그의 이름이 제거'되었다. 그는 입국할 때부터 "미국 공사관의 공의"로 고종에게 소개되었으며, 또 외교관으로 일해 왔기 때문에 재한 선교사 전체의 의견은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그는 탁원한 외교관이었다. 미국의 외교관이기 이전에 먼저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정부로부터 벼슬을 받았고, 조선 왕실과 정부를 위하여 일하였다. 알렌이 서울에 도착한 직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기간 중 모든 외국인이 피신하였으나 그는 홀로 서울에 남아 공사관을 지켰다), 청일 전쟁(그 와중에도 홀로 서울에 남아 부상병들을 치료하였다)과 한말 격동기의 위기를 몸으로 겪었다. 조선 국왕의 고문관으로, 그리고 외교관으로 활동한 그가 친노·반일 정책을 주장하다가 소환까지 당한 것도 사실은 한국 독립의 보장을 위한 생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3 년 미국 신문에 게재된 고종 황제와 미국 아가씨 에밀리 브라운 양과의 결혼 보도 사건은 분명한 오보와 날조된 기사였다. 그러나 『알렌의 일기』 제3편에 실린 논문은 이 결혼 사건은 알렌과 절친한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지의 편집장 리텐하우스가 알렌의 한국구국운동에 감동을 받아, 고종 임금과 알렌의 관계를 풍자적인 픽션 기사로 꾸민 것으로, 에밀 부라운의 자리에 알렌을 대치하게 되면 알렌의 대한제국에 대한 충정을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3) 이 논문은 루즈벨트의 친일·반로 정책에 의하여 한국의 운명과 함께 알렌도 쓰러지고 말았다는 표현과 함께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후기에 있어서 가장 헌신적인 독립투사는 국내에는 민영환, 외국인으로는 알렌이었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그 역시 순수한 미국인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미국의 이권 수호(철도·전차부설권, 전등가설권, 광산 채굴권 등)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미국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1) 김원모역, 『알렌의 일기』, (서울 :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日記임으로 내용을 소개시 도서의 페이지가 아닌 날짜를 기준으로 인용함.  

       2) 그의 일기 중에는 병원 설립과 관련하여 '묄렌도르프'와의 관계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1월 22일 일기에서는 그가 나의 계획을 방해할 것이라 하였고, 2월 20일 일기에는 묄렌도르프로 인하여 병원 설립의 기쁨보다 '조선을 떠나고 싶었다'고 기술하였다. 적은 봉금과 부채로 인한 금전적인 어려움을 털어놓고 있다. 4월 10일자 일기에 기록된 병원 개업 일은 실제적으로 4월 9일(yesterday)이다.    

       3) 이 부분은『알렌의 조선 체류기』(윤후남역,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p.11, 204)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알렌은 병원과 의학교(醫學校)의 일로 1886년 6월 14일 여의사 엘러스(Annie J. Ellers)와 함께 당상관 통정대부(정3품, 참의)의 벼슬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이 일을 6월 24일자 일기에 둘째 아들 분만(22일) 내용과 함께 적었다. 알렌은 그의 표류기에서 자신이 병원을 그만 둔 후 정부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미국인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후원으로 병원 이름이 바뀌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같은 책, pp.204-205).    

       4) 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 중 중요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주한 미공사관의 서기관이 된 그는 1892년《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를 창간하고, 1895년 J.모스에게 운산(雲山)광산의 채굴권, 96년에는 경인철도(京仁鐵道) 부설권을 주선하였으며, 1897년 주한 미국공사 겸 서울주재 총영사가 되어 전등·전차선로 부설 등을 위한 권리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1900년 영국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를 결성했으며, 1901년 주한 미국전권공사가 되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勳一等) 및 태극대수장(太極大綏章)을 받았다. 저서에 《Korean Tales》 《Things Korean》 《The Awakening of Korea》 등이 있다.

    < 이상『두산 대백과사전 1999』, (서울 : 두산동아, 1998)을 참고였음>.   특히 그가 편찬한 《한국 외교사 연표》는 구한 말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기철·신용철 편저, 『새 우리말 큰 사전』, 서울 : 삼성출판사, 1980). '앨런' 참고>.

       5) 병원 개업 이후 알렌이 선교사라는 사실을 유포하여 추방하려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조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3월 31일. 독일의 부들러 등).    

       6) 실제로 뒤따라 입국한 선교사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다. 1885년 4월 3일 일기에는 언더우드의 내한을 기다리고 있음을 표현하였고, 내한 후 언더우드 역시 알렌을 찾았다(4월6일). 그리고 그는 알렌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6월28일).   

    7) 민경배,『알렌의 선교와 근대 한미 외교』, (서울: 연세대출판부, 1989). p.237.

       8) L. H. 언더우드, 이만열역,『언더우드』, (서울: 기독교문사, 1999). pp.81-85. 언더우드의 부인인 호튼은  누구보다 알렌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부터 알렌과 함께 대궐 출입을 하였고, 또 민비에게 종교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귀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비에게 전도를 시도한 것은 언더우드 부인이 되고 난 이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그녀도 '한국에 온 목적인 그 주제에 대해서'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참았던 것이다. 민경배, p.242.

    9) 민경배, p.237.

       10) Ibid., p.312.  알렌이 미국 자본의 한국 진출을 외교적으로 강력하게 밀고 나간 세 가지 목적 중 첫 번째가 미국 세력은 곧 기독교 선교와 관계가 깊다는 것이었으며, 둘째와 셋 째는 각각 한국의 자발적인 요청, 반일(反日)을 위한 위상 확보였다는 것이다.

    11) 『알렌의 조선 체류기』, p.185.

    12) 민경배, p.312를 참조하되, J.s. Gale, Korea in Transition, New York :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09. p.163의 재인용.    

    13) 알렌의 일기, p.391.  
내용출처 : [기타] http://www.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articles/graduate-student/graduate%20student-001/Mission_Field_Study/allen.htm

초상화 파일들은 모두 http://www.kchmuseum.org/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사진들은 개별적으로 출처를 밝히겠습니다. 자료들의 출처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어하시는 사항이 있다면, 쪽지나 메일로 문의하시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한국명은 원두우(元杜尤)입니다. 미국 북장로회 교육선교사로 1885년 입국하였으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러스 G. 언더우드



 

↑ 언더우드(출처: 동아일보 2005년 4월 6일자 기사)





↑ 언더우드(출처: 새문안교회 웹사이트)




↑ 언더우드 가족(출처: 새문안교회 웹사이트)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한 국명은 안련(安蓮)입니다. 1884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입국하였으며,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당대의 세도가 민영익을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광혜원은 후에 ‘제중원’으로 개명했고, 세브란스병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호러스 N. 앨런




앨런(국민일보 2006년 4월 21일자 기사)


 

 


헨리 G.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미 국 북감리회 교육선교사로, 한국명은 아편설라(亞扁薛羅)입니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입국하였으며,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시설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설립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입국한 해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여, 한국 개신교 역사를 통틀어 최초의 교회설립자가 되었습니다.

 


헨리 G. 아펜젤러




↑ 아펜젤러(출처: 정동제일교회 웹사이트)




↑ 아펜젤러(출처: 동아일보 2005년 4월 6일자 기사)

 

 

 



윌리엄 D. 레널즈(William D. Reynolds)


한 국명은 이눌서(李訥瑞)입니다.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하였으며, 한글성경 번역시 언더우드, 게일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특히 히브리어에 능통하여, 구약 부분 번역의 책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평양신학교 설립 후 이곳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 ‘Reynolds’의 발음을 ‘레이놀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인터넷상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검색으로 찾으려 하신다면 ‘레이놀즈 선교사’로 하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윌리엄 D. 레널즈




레널즈(출처: 승동교회 웹사이트)


 

 


존 W. 헤론(John W. Heron)


앨 런과 마찬가지로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였으며, 앨런보다 1년 뒤인 1885년에 입국하였습니다. 앨런이 귀국한 뒤 광혜원의 원장과 고종의 시의를 맡은 바 있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이 이질에 걸려 1890년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가 현재의 합정동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잡게 된 것을 계기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망하면 주로 이곳에 묘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양화진 묘역’으로 알려진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존 W. 헤론


 

 



 

조저핀 P. 캠블(Josephine P. Campbell)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여성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887년 여자도(余慈度)라는 중국인 여성신자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개화기의 대표적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인 배화학당의 설립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저핀 P. 캠블

 

 


 

 


찰스 A. 클라크(Charles A. Clark)


한국명인 곽 안련(郭安連)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입국하여 곤당골교회(현재의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했으며, 1908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1941년 7월 중 미국으로 강제추방당할 때까지 한국 장로교회 형성을 주도하였으며, 몽양 여운형도 그의 업무를 도우며 영어를 배운 바 있습니다.




찰스 A. 클라크

 

 


클라크(출처: 승동교회 웹사이트)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한 국명은 모삼열(牟三悅)입니다.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하였으며, 1893년 ‘곤당골교회’를 세워 담임목사로 봉직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가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대표적인 교회인 승동교회입니다. 그는 교인들 사이에도 남아있던 신분차별을 철폐하도록 했으며, 당시 최하층 천민으로 대우받고 있던 백정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에 앞장서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불렸습니다. 그를 따르는 교인이었던 백정 박성춘은 후에 곤당골교회 장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06년 사망한 뒤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새뮤얼 F. 무어 (출처: 승동교회 웹사이트)



 

 


윌리엄 B.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1885년 모친인 메리 F. 스크랜튼과 함께 입국하였습니다. 시병원(施病院)의 원장을 지냈으며, 초기 성서번역에도 공헌한 바 있습니다.





윌리엄 B. 스크랜턴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85년 아들 윌리엄 B. 스크랜턴과 함께 입국한 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이것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입니다. 1909년 사망하여,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메리 F. 스크랜튼(출처: http://www.kchmuseum.org/)

 

 



 

맬컴 C. 펜윅(Malcolm C. Fenwick)


한 국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입니다. 본래 캐나다에서 철물 도매업에 종사했으나, 침례교에서 주최한 나이애가라 사경회에서 소명에 대한 확신을 얻고 목회의 길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 처음 입국했다가 1893년 귀국하여 보스턴의 선교사 훈련원에서 좀더 교육을 받은 뒤 1896년 재입국하였습니다. 그 뒤 함경도 원산에 교회를 설립하여, 1935년 별세할 때까지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맬컴 C. 펜윅





제임스 S. 게일(James S. Gale)


한국명은 기일(奇一)입니다. 캐나다 출신이나,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1888년 입국하였습니다. 한글성서 번역을 주도한 인물이며, 한국 최초의 영어사전을 만든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임스 S. 게일





새뮤얼 A. 마핏(Samuel A. Moffet)


한 국명은 마포삼열(馬布三悅)입니다. 1890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하였고, 1890년대 초반 한때 새문안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1901년에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그 후에는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클라크와 함께 20세기 전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힙니다.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귀국 형식으로 본국으로 갔으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사망하였습니다.




새뮤얼 A. 마핏




↑ 마핏(출처: 숭실대학교 웹사이트)

 

 



마핏(출처: 새문안교회 웹사이트)

 

 

 

 

 

윌리엄 M. 베어드(WILLIAM M.BAIRD)


한국명은 배위량(裵緯良)입 니다. 1891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했으며, 1897년 평양에 숭실학당을 설립하였고, 1906년에는 감리교회와 손잡고 이를 확장하여 ‘숭실대학’으로 개칭하였으며 이 학교에서 1915년까지 교장으로 봉직하였습니다. ‘사랑방 전도’라는 독특한 전도 방식을 도입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1931년 사망하여 평양 땅에 안장되었습니다.



↑ 윌리엄 M. 베어드 (출처: 숭실대학교 웹사이트)

 


↑ 베어드 (출처: 국민일보 2006년 10월 10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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