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양에 성령은 어떻게 임하셨는가?
How The Spirit Came to Pyung Yang

그레이엄 리(Graham Lee, 이길함)

1906
8, 우리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연합 사경회를 개최했는데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산의 하디( R.A. Hardie) 박사가 와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자신의 삶을 완전히 조종하시고 주님께 봉사하도록 강하게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라는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사경회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선교사 연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갔고, 그곳에서 하워드 존스턴(Howard Agnew Johnston) 박사를 만났는데, 그를 통하여 서울 선교사들이 매우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스턴 박사가 평양에 와서 머무는 동안, 우리 한국인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인도에서 성령이 놀랍게 나타나신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존스턴 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 성도들도 똑같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열망이 생겨나고 나서부터 축복이 임할 때까지 그 일을 위해 한국인 성도들과 선교사들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연례회에 돌아와서 특별 기도회를 몇 차례 가지면서 하나님의 영이 쏟아 부어지기를 기도했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국인 성도들은 집회에 즐겁게 참여했지만 성령은 권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기도했으며 성탄절을 지내면서 우리 선교사들의 마음 속에 특별 기도주간을 가지자는 생각이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이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회가 끝나기 전에 남성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700명의 성도들이 2주간 동안 성경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이 겨울 사경회 때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강렬한 기대감을 주셔서, 우리 장로교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이 겨울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이러한 일은 우리 자신에게도 큰 이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오 기도집회를 우리에게 '벧엘'(bethel)이었기 때문입니다.
1907
1 6, 우리는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 시내 4개 장로교회 교인들이 참여한 연합 겨울 사경회를 저녁 기도회로 시작했습니다. 이 집회를 남자와 여자가 함께 드리기에는 예배당 건물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장대현 교회에서는 남자 성도들만 모이도록 했고, 여자 성도들은 네 개의 다른 장소로 나누어 집회를 갖고, 학생들은 숭덕학교 부속 예배당에서 집회를 갖도록 했습니다.
장대현 교회는 약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데. 매일 밤 교회는 만원이었습니다. 집회는 토요일 저녁까지 매 저녁마다 열렸는데 능력이 점증적으로 나타났고 토요일 저녁 집회 때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주일 낮에는 각 교회로 흩어져 정규 예배를 드렸고, 주일 저녁에 다시 장대현 교회에 모여 연합으로 계속 집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저녁 집회 때부터 위대한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지만 큰 축복을 받지는 못했고 그 대신 대단히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회는 마치 죽은 것 같았고 하나님의 영은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설교를 한 번 하고 몇 명이 피상적인 신앙고백을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자백한 것인 없었던 셈인데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가진 채 숙소로 갔습니다. 그 이전까지 집회에서는 혼이 깃든 신앙고백이나 실질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죄의 고백들이 있었지만 이번 주일 저녁 집회는 모든 것이 차단된 것 같았고 집회는 죽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국인 형제들도 우리 선교사들과 같은 느낌을 가졌고, 주일 저녁은 참으로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월요일 낮 집회 때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며 소리를 높여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월요일 저녁에 축복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날 하루 종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도하면서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저녁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갔습니다. 우리가 장대현 교회 예배당에 다다랐을 때에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짧게 마친 후에 우리는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했고, 모든 청중이 이에 동참했습니다. 설교를 짧게 마친 후에 우리는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했고, 모든 청중이 이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 통성기도는 이번 집회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였습니다. 기도 후에 자복이 있었고 그 후에 찬송을 부른 후 인도자는 회중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후 집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집에 가라고 하면서 원하는 사람들은 남아서 아침까지 우리와 함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를 자백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500명 내지 600명 정도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예배당의 한쪽 날개(남자석)으로 모아 놓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제껏 경험 해 보지 못한 집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드린 후에, 소리를 내서 죄를 고백했는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 곳에 모인 회중에게 강림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회중이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내어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복하였는데 자신의 죄에 대한 고통과 번민으로 마룻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주먹으로 땅을 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우리 집 요리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려고 애쓰다가 그러는 중에 자복 하고 기도실 맞은편에 있던 내게 소리쳤습니다.
"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나에게도 희망이 있습니까? 나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 리고 그는 바닥에 자신을 내던지고 울고 또 울었는데, 극심한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가 죄를 고백하면 즉시 전 회중이 통성으로 기도했는데 수백 명이 회중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는 그 광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죄의 고백이 이어진 후 회중들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모두 눈물을 흘렸고 울고 기도하는 식으로 집회를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장대현 교회의 중진, 특히 강씨(강유문)와 김씨(김찬성)가 서로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우리 몇몇 선교사는 집회 기간 동안에 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화해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드디어 월요일 밤 강씨는 용기를 내어 자신이 얼마나 김씨를 싫어했는지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처럼 당당하고 완고했던 강씨가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이 얼마나 김씨를 싫어했는지 말하려고 애쓰다가 다시 쓰러지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새벽 2시쯤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자신의 죄를 자백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배당이 점점 추워졌고, 또한 저녁 집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집회를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요일 저녁 기도 집회 때 우리 선교사들은 전날 저녁에 있었던 놀라운 집회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고, 화요일 저녁 집회에는 더 위대한 축복을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월요일과 마찬가지 형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한국인 목회자 중에서 가장 은사를 많이 받은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끝난 후에, 원하는 사람은 모두 집에 가도록 했는데 또 다시 600명 정도가 남았습니다. 화요일 집회는 월요일 저녁 집회와 거의 똑같았지만, 집회 중에 나타난 역사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우리 몇몇 선교사는 교회 중진, 특히 김씨(김찬성)와 주씨(주공삼)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두 사람이 자백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화요일 저녁 집회는 김씨가 힘을 얻어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을 때 정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강단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곧 바로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씨는 마음 속으로 다른 형제, 특히 블레어(W.N. Blaire) 선교사를 미워하였음을 자백했고 그러한 미움들을 모두 쏟아냈습니다. 김씨가 겪었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마치 발작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가 자복했을 때 모든 회중은 온통 눈물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그들은 울고 또 울고, 계속 울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도 그들과 같이 울었는데 아무리 해도 그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전 회중이 눈물 흘리며 울고 있을 때 강씨가 기도하기 위해 나왔는데, 그는 속속들이 자복했고 마치 자기 심장을 찢는 것처럼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형제들이 그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에게 팔을 올려놓자 그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그 후 강씨는 김씨에게로 가서 사랑스럽게 그를 끌어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김씨는 정신이 들자 블레어 선교사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
블레어 목사님,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나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블레어 목사님도 기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버지!"라고 한 후 한두 마디 말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미 형용할 수 없는 감격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회중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전혀 멈추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회중이 잠잠해지도록 찬송을 불러야만 했는데, 그 중 몇 사람은 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 회중은 잠잠해졌고, 다시 죄의 자백이 시작되어 집회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날 저녁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숭실대학교 학생이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에 대하여 사람들 앞에서 자백할 것을 요청했고 기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그 학생은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도는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완전히 벗겨지는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간음과 미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일과 지금은 잊었습니다만 여러 가지 죄들을 고백했습니다. 그 학생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거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고, 그가 울자 다른 회중들도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마치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집회로 겨울 사경회는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 집회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이제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쁜 것은 수요일 저녁 4개 교회로 나누어 가진 기도회에서도 동일하게 강력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전에 수요일 저녁 집회 때 장대현 교회 장로 두 명을 선출하겠다고 공고한 바 있었는데, 예배를 드리는 도중 그날 저녁 장로를 선출하려고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날 밤 장로로 선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배를 짧게 마친 후에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남은 교인들이 자리를 잡자 우리는 함께 통성으로 개도했고, 그 즉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백하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몇 명이 자백한 후 주공삼 장로가 용기를 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집회는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그 놀라웠던 화요일 집회 내내 주 장로는 자리에 있었는데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주 장로가 사람들 앞에서 자백해야 할 끔찍한 되가 있음을 확신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는 강단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내 옆에 섰는데 그것을 본 나는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주 장로가 굴복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깨끗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 장로는 더듬거리며 자백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점 또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자 그의 모든 죄가 드러났습니다. 주 장로는 간음과 교회 돈을 횡령한 죄를 자백했는데 이를 자백하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 휩싸인 듯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보아 온 적 중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에 사로잡힌 인간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는데 그가 강단에서 떨어질 것 같아 나는 그들 두 팔로 붙들어 주어 서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음 속에 두려운 고통을 느끼면서 주 장로는 소리쳤습니다.
"
이제껏 나보다 더 끔찍한 죄인이 있었습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손으로 온 힘을 다해 설교 단을 내리쳤습니다. 마침내 그는 바닥에 누워 용서를 구하며, 고통 가운데 몸을 비틀고 또 비틀었습니다. 주 장로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곧 죽을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그것은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 그러자 한국인 형제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그를 끌어안고 번민으로 고통 받는 그를 위로해 주었는데, 그 장면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주 장로가 자복하자마자 전 회중은 울음을 터트렸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또 울었고, 전혀 그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찬송을 불러야만 했습니다. 집회를 조금 더 가진 후에 모든 교인이 해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에 있음을 감사 드렸고, 주 장로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도록 만든 성령의 능력을 그가 받아들이도록 이끄신 것에 더 감사를 드렸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성숙한 소녀와 부인들을 위해 설립한 숭의여학교에서도 똑같은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교장인 스눅(V.L. Snook)양은 평소처럼 학교에 갔고, 1교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0시에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사실 그 날은 정규 예배가 없는 날이었습니다. 짧은 설교와 기도를 드린 후, 여학생들은 고꾸라져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는12시를 넘긴 후에도 기도와 눈물, 그리고 죄의 자백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금요일에는 모든 수업을 뒤로 미루고 아침 내내, 그 이전 이틀 동안과 마찬가지 형태로 집회를 가지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장대현 교회 부속 숭덕학교에서도 똑 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교는 여느 날과 같이 시작 되었지만 어디에서도 수업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후 1시까지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 중 세 명은 집회가 집행되는 동안 자제력을 잃고 극도의 긴장감에 쌓여 정신을 잃었습니다. 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한국인 교사들은 그러한 긴장감을 어떤 식으로 적당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요일 오전에는 성령이 어린 소녀들이 다니는 숭현여학교에도 내렸습니다. 우리 선교사들 중 일부가 학교 교실 옆을 지나던 중 비통하게 우는 소리를 듣고 그곳에도 똑같은 성령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사 베스트(M. Best) 양이 즉시 학생들을 돌아보기 위해 갔습니다. 그 소속을 들은 번헤슬(C.F. Bernheisel) 부인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기 위해 시내에 있는 여학교로 내려갔습니다. 번헤슬 부인이 여학생들에게 몇 마디 말씀을 전하자 그 즉시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요일 정오에 우리가 드린 기도회에서도 똑같은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평소에는 30분 가량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날 우리는 2시까지 기도회를 계속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그러한 기도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임하셨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를 공격적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려 노력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남자 사경회가 열리는 기간 내내 여신도들도 다른 곳에서 독자적으로 집회를 가졌는데 여성 집회에서는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성들을 위해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집회 중에 몇 명이 죄를 형식적으로 고백하고 독선적인 노파가 일어나 두서없이 몇 마디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 자리에서는 성령께서 힘 있게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목요일 밤이 되어서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고, 여성들도 남성들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를 자백하면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한 젊은 소녀의 자백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는데, 그는 오랫동안 우리 모두에게 고통과 안타까움을 안겨주건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 밤 그 소녀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마치 사진의 심장이 부서진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주일 오전, 장대현 교회에서 우리는 평소와 같이 성경 공부 반을 열었고 오후 예배 때 또 다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길선주 장로가 설교했는데 그는 아주 생생한 연극으로 설교를 끝냈습니다. 그는 줄로 자신의 허리를 동여맨 후에 교회의 임원 중 한 사람에게 줄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단 저편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매큔(G.S.McCune) 선교사에게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 자세로 길선주는 죄에 매인 죄인이 그 죄를 끊고 하나님께로 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이렇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치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기 몸을 움직이려고 애쓰고 몸부림쳤습니다. 마침내 줄이 끊어지고 그는 강단을 향해 돌진하여 매큔 선교사와 서로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습니다.
나는 블레어 선교사와 함께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러 가서 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매큔 선교사가 후에 들려주기를, 길선주 장로가 줄을 끊으려고 몸부림치자 전 회중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줄이 끊어지고 길선주와 매큔 선교사가 서로 끌어안자 그 효과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답니다. 수많은 남자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고, 다른 이들은 극심한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마룻바닥에 몸을 내던졌답니다. 길선주 장로는 교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저녁 집회 때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에는 여성들을 위한 집회만 열렸는데 또다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 집회의 긴장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한 여성은 의식을 잃었고 다른 이들도 거의 통제력을 잃을 뻔했습니다.
평양 사람들을 모두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던 집회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평양 밖에 있는 시골 지역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블레어 선교사와 나는 지방 사경회를 인도하고 막 돌아왔는데, 이 사경회에서도 평양과 동일하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자신의 죄로 인한 엄청난 고통과 그 죄를 자백함으로써 얻은 엄청난 기쁨과 평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시작된 이 은혜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리고, 우리가 평양에서 본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는 위해 준비 하시고, 우리뿐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위해 준비하신 위대한 축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올려 두리며, 주님의 이름이 영원, 또 영원히 영광을 받으소서.

[
출전:G.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Mar., 1907] 번역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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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Possible/한국선교역사 | Posted by lamie 2007. 10. 17. 13:04

한국선교역사 개략

한국선교역사120년
 

1884 년 일본주재 미 감리교선교사 맥클레이가 입국해 고종을 알현하고 의료 및 교육 사업 실시에 대한 선교허가 받는다. 9월 미국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이 한국 주재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로 내한한다. 이후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중상 입은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완치 시켜 왕실의 호감 얻어 선교에 큰 도움을 받는다.

1885년 4월 5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인천에 입국해 본격적인 한국 개신교 선교를 시작. 4월 10일에는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 설립(국립 병원으로 설립, 후에 재중원으로 개칭함)되고, 8월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 학당을 설립한다. 같은 해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톤은 9월에 정동 제일 병원을 개설 한다.

1886 년 5월말 여성 선교사 스크랜톤이 최초 근대의 여성교육 기관인 이화학당 설립함으로써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7월 11일 노 춘경, 일명 노도사라 불리 우는 그는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 한국 내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887년 1월 서 경조, 최 명오, 정 공빈 등 3명이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 받고 9월 27일 로스와 한국인 신자 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그 해 10월 서울로 입성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 교회로 정동 제일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1889년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 여행 중 서북 지방을 순회 전도하면서 의주에서 김 이련, 김 관근 부자 등 의주 교인 33명에게 이른바 요르단 강 세례를 주었다.

1896 년 최초의 기독교 학생 운동체인 협성회가 서재필에 의해 조직되었다.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 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 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1897년 10월 신앙 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감리교 엡윗청년회가 조직되었다.

1899년 4월 미국 실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과 아펜젤러 의사의 노력으로 세브란스 병원 설립이 설립되었다.

1901년 5월에는 미 감리회의 김 창식, 김 기범 등이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3 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성서 번역 위원회의 참석차 목포로 가다 선박 충돌사고로 순교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반 기독교 운동에 대해 교회는 변호와 적극적 사회 운동을 추진하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인 YMCA가 게일 선교사에 의해 창립되었다.

1904년 9월 남 감리회에서 김 흥순을 감리교 최초의 전도사로 허가하였다.

1906년에는 4월 평양 길 선주 목사에 의해 새벽 기도회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1908 년 3월 한국인 목사 길 선주의 주례로 세례식 거행되어 한국인 목사로서는 최초로 201명에게 세례 주었다. 또한 남 감리회와 간도 선교회를 조직하여 이 화춘 선교사를 북간도에 파송 하였고 10월에는 호가르트 정령 내한으로 구세군을 한국본영 창설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구세공보가 창간되었으며, 점점 식어 가는 부흥 기운을 되살릴 수 있는 새 계기를 마련키 위해 전국적으로 백만명 구령 운동이 일어났다. 9월 장로교의 최 관흘 목사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이 선관 여사를 제주도 여성 선교사로 한 석진 목사를 동경 유학생 선교 목사로 파견하였다. 10월에는 구세군, '구세신문' '구세군가'를 발간하였고 사관 학교 설립하여 선교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1911년 3월에는 성결교의 '복음가', 안식교의 ‘찬미가’가 발행되었고 4월에는 구약성서 발간으로 성경전서 완역이 간행되었다.

1914년 1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브라운 리가 한국 최초의 유치원인 이화 유치원을 개원한다.

1919 년 3월 1일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한 관계로 극도의 탄압과 피해를 입으며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금주 동맹회 절제 운동과 수원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사건이 발행한다. 이로 인해 재암리 주민 30여명이 학살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김 활란 전도단이 창립되었고 5얼에는 YMCA, 평양 신의주, 성진 등 지방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6월에는 감리교 중심의 금연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1년 5월 29일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기독교 증험론을 발행하였고, 6월 14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기독교 감리회에서 여 목사의 안수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33년 1월 20일에는 기독교 감리회의 면려 회보와 감리 회보가 발행되었다.

1934년 6월 한국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식을 배재 학교에서 대규모 기념 행렬로 거행하였다. 또한 10월에는 장로교 선교 50주년 기념 대회 개최하였다.

1938 년 신사 참배 강요로 교회 수난이 심화되었고 기독교계 학교들이 계속 폐교되었다. 2월에는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신앙 수호 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주기철 목사가 평양감옥에 구금되고 장로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9월 10일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와 같은 항거 끝에 주기철 목사는1944년 4월 21일금요일밤 9시에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1946년 38선 이북에서는 공산당의 기독교 박해 시작되었고 9월에는 KNCC(한국기독교 연합회) 창립 되었다.12월에는 연희대학 ·이화여대, 종합대학으로 승격. 서울 신광 여 * 중고 등 많은 기독교계 학교 설립되었으며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됐던 많은 학교들도 재 개교하였고 기독교 교육 진흥의 기틀이 되었다.

1948년 4월 20일 김 양선 목사가 교회사 자료를 수집 하여 한국 기독교 박물관을 남산에 개관하였고 KSCF(한국기독교 학생 전국 연합회)창립, KNCC라는 기독교 방송국 설립 준비가 이루어졌다.

1952년 12월 15일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가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1957년 11월 1일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를 김 곤준 목사에 의해 창립하였고 전국에 모든 대학 캠퍼스에 전임 강사를 파송하여 활발한 전도와 제자화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1984년 8월 15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개신교 백 주년 선교 대회 예배를 드렸다.

1989년 4월 28일에는 교계 원로 목사 10명의 제창으로 각 교단 증경 총회장 및 기관단체 대표들이 함께 회동, 기도회를 갖고 창설을 협의하여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를 설립하였다.

2000년 8월 14-18일 한국 세계 선교 협의회(KWMA)의 주최로 2000년 세계 선교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거룩하신 분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남중앙침례교회 선교위원회 000입니다.
올 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일들을 겪으면서, 여기 저기에서 움츠러드는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세밀하게 일하시는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약함을 넘어 강하게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약하고 부족한 그대로의 모습으로만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현재까지 교회와 선교지 간에 있었던 단기 사역의 모습을 돌아보고 더욱 성숙되는 기회를 갖고자 아래와 같은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살펴보시고, 현지의 사역과 교회의 지원이 조화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도움 부탁드립니다.

1. 취지
교회에서 단기팀을 선교지로 보냄에 있어, 실제 선교지의 필요가 파악이 되지 않아 인력의 낭비, 비용의 낭비 ,시간의 낭비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습니다.
교회가 조금 더 선교 사역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원하며, 효율을 높이고자 먼저 선교지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합니다.

2. 교회에서 지원 가능한 분야는 아래와 같습니다.(단기 사역)
1) 언어 교육 - 한국어, 영어
2) Worship 및 찬양 사역
3) MK 교육
4) 악기 지도
5) 이미용 활동
6) 의료 활동
7) 노동 사역
8) 전도 활동
9) 컴퓨터 교육
10) 성경camp 활동
11) 기타 - 협의 발굴 후 결정

3. 현 사역지에서 필요한 사역 형태에 대해 아래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 사역 형태
                  a.
                  b.
                  c....
-. 기타 필요성이 있는 사역의 형태 제안
                  a.
                  b.
                  c....

회신해 주신 내용은 교회의 선교 전략을 수립하는데 유용하게 사용 될 것입니다.
보내주신 내용대로 기도할 것이며, 조금 더 교회의 자원이 완전히 드려지는데에 노력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장에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하더라도 앞을 바라보며 격려와 기도록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선교지의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바쁘신 중에 아무쪼록 시간을 내어 주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승리하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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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묵상 | Posted by lamie 2007. 9. 6. 13:22

아이성

아이성의 패배가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아이성의 실패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되돌아 가거나,
혹은 다른 만만한 성을 찾아야 했을까?

아이성의 경험은 이스라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아이성의 패배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각이, 또 그와 같은 자가 軍 중에 있는 한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패배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다. 패배를 통해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지혜롭게도 이스라엘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리지도, 요단강을 다시 건거 애굽으로 동아가지도, 그리고 다른 성을 찾지도 않았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성경의 역사는 달라지고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서의 내용들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멈추어 서서 하나님께 물어보았고, 패배의 원인을 알게 되었으며 그 죄에서 철저히 분리되기를 서슴치  않았다.

한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다가 실패했는가?
아니다!
크고 멋지게 해 보려다가 난관에 부딛혔는가?
맞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낙담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왔는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더 이상 교회를 세우지도 않을 것이며, 그 지역에 대해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왜 낙담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 처럼...
교회를 세우지 못해서 낙담했는가? 아니다, 교회는 세워졌다.
선교의 방해가 심해서 낙담했는가? 아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누가 반대하고 막을 수록 더 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왜 실망했는가? 왜 낙담했는가?
큰 교회 답게 성대한 예배를 드리지 못해서 그런가?
성도들을 기십명이나 모시고 갔는데, 쫓기듯이 다녀야 해서 그랬는가?
큰 돈 들여서 선물도 준비 했는데, 제대로 나누어 주지도 못하고 교회 사람들끼리만 나누어 가지게 되서 허탈해서 그런가?

그게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을 이유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우리 안의 죄 때문에 낙담한 것이 아닐까?
선교도 하고, 교회 이름도 퍼트리고, 한 줄 더 적어넣을 수 있는 이력도 생기고, 우리는 이렇게 한다 라고 하는 자랑도 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서 낙심한 것이 아닌가?
복음은 전해지고 있고, 더 전해 질 수 있는데 다른 데에만 눈이 밝아져서 그냥 주저 않아 있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이스라엘 처럼 아각을 돌에 묻지도 못하고,
과연 아각과 동행하며 다른 성을 칠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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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Possible/펜윅선교학교 | Posted by lamie 2007. 4. 22. 15:38

선교의 금언

선교의 금언 - 선교사가 되려면(오스왈드 스미스)에서 발췌

"당신이 직접 가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화석처럼 되고 말 것이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한 번씩 들어보기도 전에 왜 어떤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그 복음을 들어야 하겠는가?"
"당신이 직접 복음을 가지고 갈 수 없다면, 당신은 복음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낼 수 있다."
"만일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것이 한나미의 뜻이라면 당신이 선교 헌금을 거절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전교회의 가장 시급한 일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복음을 거듭해서 들어야만 되는가?"
"하나님과 함께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과 함께 해 주실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비젼을 보았다. 그 이후로 나는 자신만을 위해서는 살 수 없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기 전에는 내 생명이란 별로 가치있는 것이 못 되었다."
- 오스왈드 스미스 -

"한 세대는 오직 그 세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의 사명은 선교이다."
"어느 곳에든지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동정(sympathy)은 행동의 대용물이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리스도 혼자서 세상을 건지시지는 않는다."
"병든 교회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은 선교를 위한 식이요법을 시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 종교사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충동시켜 주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그것은 이 곳 본국에서 자멸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는 하지만 결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기도할 수는 없단 말인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독생자를 선교사로 만드셨다."
"멀리, 점점 더 멀리, 흑암의 세계 속으로 가라."
-데이비드 리빙스턴-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윌리엄 캐리

"교회의 존재 가치가 정당화될 수 있는 길은 교회가 선교의 책임을 이룩하는 것 밖에 없다."
"사람이 수백만불 이상을 남겨놓고 죽을지라도 , 저 하늘 나라에는 단 한 푼도 갖다 놓지 못할 수 있다."
-윌리암 페틀러

"가장 멀리, 가장 밝게 비추는 빛은 가장 가까운 집안에서 부터 빛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른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스터드

"당신의 수입에 따라서 하나님께 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헌금에 따라 당신의 수입을 제한하실 수도 있다."
-피터 마샬

"선교의 전망은 하나님의 약속 만큼이나 밝다."
-저드슨

"나는 아제 하나님을 위해서 나 자신을 불태워 버리겠다."
-헨리 마틴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보다 더 수고하고, 보다 더 괴롭고, 보다 더 고통스럽게 하소서."
-프란시스 사비에르

"우리가 사랑 없이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 없이 사랑 할 수는 없다."
"전도하기를 멈추는 교회는 머지 않아 곧 복음적인 교회로 남이 있지 못할 것이다."
-알렉산더 더프

"내 돈을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드릴 것인가 하지 말고 하나님의 돈을 내가 얼마나 많이 간직할 수 있을까 하라."
"교회의 최고 과제는 세계의 복음화이다."
"수백만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당신이 이 땅에서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영혼들을 건지는 일이다."
-존 웨슬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는 한,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시간과 정력을 바친다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웬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결과에 상관없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진젠도르프

"나는 이제 죽어가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를 위하는 일 외의 다른 일에는 내 삶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오직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또 내가 어떤 고생을 겪었는가 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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