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파일들은 모두 http://www.kchmuseum.org/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사진들은 개별적으로 출처를 밝히겠습니다. 자료들의 출처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어하시는 사항이 있다면, 쪽지나 메일로 문의하시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한국명은 원두우(元杜尤)입니다. 미국 북장로회 교육선교사로 1885년 입국하였으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러스 G. 언더우드



 

↑ 언더우드(출처: 동아일보 2005년 4월 6일자 기사)





↑ 언더우드(출처: 새문안교회 웹사이트)




↑ 언더우드 가족(출처: 새문안교회 웹사이트)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한 국명은 안련(安蓮)입니다. 1884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입국하였으며,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당대의 세도가 민영익을 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광혜원은 후에 ‘제중원’으로 개명했고, 세브란스병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호러스 N. 앨런




앨런(국민일보 2006년 4월 21일자 기사)


 

 


헨리 G.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미 국 북감리회 교육선교사로, 한국명은 아편설라(亞扁薛羅)입니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입국하였으며,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시설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의 설립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입국한 해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여, 한국 개신교 역사를 통틀어 최초의 교회설립자가 되었습니다.

 


헨리 G. 아펜젤러




↑ 아펜젤러(출처: 정동제일교회 웹사이트)




↑ 아펜젤러(출처: 동아일보 2005년 4월 6일자 기사)

 

 

 



윌리엄 D. 레널즈(William D. Reynolds)


한 국명은 이눌서(李訥瑞)입니다.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하였으며, 한글성경 번역시 언더우드, 게일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특히 히브리어에 능통하여, 구약 부분 번역의 책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평양신학교 설립 후 이곳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 ‘Reynolds’의 발음을 ‘레이놀즈’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인터넷상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검색으로 찾으려 하신다면 ‘레이놀즈 선교사’로 하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윌리엄 D. 레널즈




레널즈(출처: 승동교회 웹사이트)


 

 


존 W. 헤론(John W. Heron)


앨 런과 마찬가지로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의료선교사였으며, 앨런보다 1년 뒤인 1885년에 입국하였습니다. 앨런이 귀국한 뒤 광혜원의 원장과 고종의 시의를 맡은 바 있습니다.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이 이질에 걸려 1890년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가 현재의 합정동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잡게 된 것을 계기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망하면 주로 이곳에 묘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흔히 ‘양화진 묘역’으로 알려진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존 W. 헤론


 

 



 

조저핀 P. 캠블(Josephine P. Campbell)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여성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887년 여자도(余慈度)라는 중국인 여성신자와 함께 입국했습니다. 개화기의 대표적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인 배화학당의 설립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저핀 P. 캠블

 

 


 

 


찰스 A. 클라크(Charles A. Clark)


한국명인 곽 안련(郭安連)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0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입국하여 곤당골교회(현재의 승동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했으며, 1908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1941년 7월 중 미국으로 강제추방당할 때까지 한국 장로교회 형성을 주도하였으며, 몽양 여운형도 그의 업무를 도우며 영어를 배운 바 있습니다.




찰스 A. 클라크

 

 


클라크(출처: 승동교회 웹사이트)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한 국명은 모삼열(牟三悅)입니다.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하였으며, 1893년 ‘곤당골교회’를 세워 담임목사로 봉직하게 되었는데 이 교회가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의 대표적인 교회인 승동교회입니다. 그는 교인들 사이에도 남아있던 신분차별을 철폐하도록 했으며, 당시 최하층 천민으로 대우받고 있던 백정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에 앞장서 ‘백정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불렸습니다. 그를 따르는 교인이었던 백정 박성춘은 후에 곤당골교회 장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06년 사망한 뒤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새뮤얼 F. 무어 (출처: 승동교회 웹사이트)



 

 


윌리엄 B.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1885년 모친인 메리 F. 스크랜튼과 함께 입국하였습니다. 시병원(施病院)의 원장을 지냈으며, 초기 성서번역에도 공헌한 바 있습니다.





윌리엄 B. 스크랜턴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85년 아들 윌리엄 B. 스크랜턴과 함께 입국한 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으며 이것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입니다. 1909년 사망하여,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메리 F. 스크랜튼(출처: http://www.kchmuseum.org/)

 

 



 

맬컴 C. 펜윅(Malcolm C. Fenwick)


한 국 최초의 침례교 선교사입니다. 본래 캐나다에서 철물 도매업에 종사했으나, 침례교에서 주최한 나이애가라 사경회에서 소명에 대한 확신을 얻고 목회의 길에 투신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 처음 입국했다가 1893년 귀국하여 보스턴의 선교사 훈련원에서 좀더 교육을 받은 뒤 1896년 재입국하였습니다. 그 뒤 함경도 원산에 교회를 설립하여, 1935년 별세할 때까지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맬컴 C. 펜윅





제임스 S. 게일(James S. Gale)


한국명은 기일(奇一)입니다. 캐나다 출신이나,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1888년 입국하였습니다. 한글성서 번역을 주도한 인물이며, 한국 최초의 영어사전을 만든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제임스 S. 게일





새뮤얼 A. 마핏(Samuel A. Moffet)


한 국명은 마포삼열(馬布三悅)입니다. 1890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하였고, 1890년대 초반 한때 새문안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1901년에 평양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그 후에는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클라크와 함께 20세기 전반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힙니다.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귀국 형식으로 본국으로 갔으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사망하였습니다.




새뮤얼 A. 마핏




↑ 마핏(출처: 숭실대학교 웹사이트)

 

 



마핏(출처: 새문안교회 웹사이트)

 

 

 

 

 

윌리엄 M. 베어드(WILLIAM M.BAIRD)


한국명은 배위량(裵緯良)입 니다. 1891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입국했으며, 1897년 평양에 숭실학당을 설립하였고, 1906년에는 감리교회와 손잡고 이를 확장하여 ‘숭실대학’으로 개칭하였으며 이 학교에서 1915년까지 교장으로 봉직하였습니다. ‘사랑방 전도’라는 독특한 전도 방식을 도입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1931년 사망하여 평양 땅에 안장되었습니다.



↑ 윌리엄 M. 베어드 (출처: 숭실대학교 웹사이트)

 


↑ 베어드 (출처: 국민일보 2006년 10월 10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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