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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7 선교사 알렌
Mission Possible/한국선교역사 | Posted by lamie 2007. 10. 17. 12:52

선교사 알렌

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 역사

 

 

한국 초기 선교 이해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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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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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윤     탁

(선교신학 박사과정)

   1. 알렌의 일기(槪要)를 통하여 살펴 본 그의 생애(略史)  

   2. 일기에 나타난 시대적 상황과 그가 본 한국인

   3. 선교사 알렌과 그의 선교    

          1) 선교사로서의 알렌           2) 선교사들과의 갈등과 고통

   4. 외교관으로서의 알렌 이해  

 

 1. 알렌의 일기(槪要)1)를 통하여 살펴 본 그의 생애(略史)

 알렌(Horace N. Allen, 1858. 4. 23 ∼1932. 12. 11.)은 구한말 미국의 선교사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한 외교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 자명으로 안련(安連). 오하이오주(州) 델라웨어 출생한 그는 1881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 신학부를 거쳐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의학박사)을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1883년 5월 17일) 동급생이었던 메신저(Frances Ann Messenger)와 결혼하였다. 북장로교 외국 선교부 의료선교사로서 중국 상하이(上海, 8월 20일 출발, 10월 11일 도착)에 도착한 그는 그 해 10월 15일 남경에서 의료업을 개업하여 어학 공부를 하였으나 1884년 1월 상해로 돌아왔다. 그 해 알렌은 출산(7월 10일)한 아내를 상해에 남겨 두고 부산을 거쳐(9월 14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 이 날이 9월 29일(토) 이었다.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있으면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4.)때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사(侍醫) 겸 고종황제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1885년 1월 22일 대리공사였던 포크를 통하여 병원 설치안을 제출, 2월 20일 승인을 받아 갑신정변에서 참살을 당한 홍영식의 집을 수리하여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였는 데, 4월 9일 개업하였다.2)  4월 26일 고종은 이 병원을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20여명의 관리와 하인을 배치하였으며 이 한 해 동안 스크랜톤(감리교)과 헤론(장로교)의 도움으로 1만 여명을 치료하였는다. 장티푸스, 천연두, 이질, 폐결핵, 매독, 나병등의 악질성 환자가 대부분이었다.3) 1885년 8월 5일 기녀(妓女, Dancing Girl) 5명이 첫 여자 의학생이 되었는 데, 그 이후 동료(언더우드와 헤론)들과 적대감을 가져가면서 추진된 의학교(조선 왕실 병원 제중원 부속 의학교, Medical and Scientific School)가 개교한 것은 1886년 3월 29일이었다.

 

  선교사로서 가장 갈등이 심하였던 시기는 1886년 가을에서 1887년 9월까지였다. 헤론과의 관계 악화로 선교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 알렌은 서울을 떠날 결심도 하게 되지만 선교 본부에서는 거절하게 된다(1886. 10. 10). 그러나 알렌은 오히려 정부로부터는 참판의 벼슬을 가지게 되었고(10월 25일), 술에 빠져있던 포크 공사가 조선을 떠남으로 알렌은 국왕을 더 가까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1887년 9월 이후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87 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도미(渡美)하게 된 알렌은, 독립국인 대한제국(大韓帝國)에 대한 청(淸)나라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美) 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다시 내한하여 7년 동안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이 당시의 활동 내용은 <알렌의 일기>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1897년 9월 13일 주한 미국 공사로 임명 이후 러·일 관계와 관련된 외교적인 기록(1897. 9. 14. - 1898. 7. 27.)과 시베리아를 경유한 세계 일주 여행 기록(1903. 6. 1.- 11. 20.)을 일기로 남겨 놓았을 뿐이다.4) 그러나 이 일기에서 알렌은 미국을 다녀온 후 친미당(親美黨)으로 '독립, 독립'을 외치던 이완용이 친로(親露) 행위와 친일파(親日派)로의 변신 내용을 기술하면서 결코 한국 정부의 공직을 갖지 말았어야 할 인물로 평가하였다(1897. 10. 14).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일기 중에는 자신의 음주 사실(1885. 8. 5./ 1903. 6.14.)과 흡연 사실(1888. 1. 13)도 기록하였다.

 

  결국 반일 친노 정책을 역설하던 알렌은 친일·반로정책을 고수하는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정책 마찰로, 외교관인 동시에 선교사로서 음으로 양으로 선교 사업을 돕기도 하였으나 결국 1905년 3월 해임되어, 그해 6월 9일 귀국하였다(당시 나이 47세). 오하이오주 도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일기에 나타난 시대적 상황과 그가 본 한국인

  조선은 오늘날 선교 활동을 벌인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사실상 자신들만의 종교가 없었다. 유교는 섬기는 신이 없는 도덕 규범일 뿐이었고, 불교는 평판이 나빴다. 게다가 조선인들은 본래 매우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인도처럼 종교적 진리를 전파하거나 종교 단체를 조직하는 일을 방해하는 특권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 활동의 길이 활짝 열려 있는 셈이었다. <알렌의 조선 체류기에서>    

 

 

  ' 알렌의 조선 체류기'에 나타난 그의 한국 경험은 신비롭다 못해 흥미로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조선인의 순박한 모습과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 안팎의 실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의사에 눈에 비친 질병과 무지와 빈곤, 외교관의 눈에 비친 혼란과 부패함과 폐쇄성, 선교사의 눈에 비친 미신과 무기력과 나태함…. 그러나 그는 긍정적이고 해학적인, 그리고 흥미롭게 당시의 시대상을 경치를 구경하듯 읽을 수 있도록 조선과 조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 나타난 당시 상황은 단순히 흥미로운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선의 상황과 조선인의 생활 모습이 직접 그의 삶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방시설도 없는 호텔 방에서 구두를 베개삼아 자야 했고, 가족을 데리러 상해로 가는 배에는 거의 모든 남자가 정부(情婦)를 대동(매춘부도 동승)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품행은 충격적이었다(1884. 10. 11). 갑신정변은 알렌이 조선 정부(왕)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민영익의 치료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일기(1884. 12. 5.)에 기록한 그는 대체로 한방 치료를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며(85. 1. 11.) 상대방이 의문을 가질 때는 비교적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85. 2. 21.).

 

  특히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이나 지도적인 인물에 대한 혹평도 빠뜨리지 않았다. 12명으로 구성된 초대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 일행을 인솔하고 워싱턴을 향하는 배에서 쓰여진 일기 중에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심한 악평들을 하고 있다(1987. 12. 26).

 

 

  조선 사절단은 1등석 5장만 가지고 있었지만 나머지 5명은 2,3등 선실에 모여 식사도 같이 하면서 지냈는 데, 어찌나 더러운지 그들이 풍기는 악취를 참을 수 없었다. …

두 사람의 조선인 강진희는 지분거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이상재도 더러운 사람인 데, 이 두 사람은 그들의 객실에서 박공사와 함께 식사했다. … 박공사는 사절단 일행 중 가장 나약하고 바보 천치같은 인물이었다. 조선 정부가 정식으로 임명한 번역관 이채연은 영어 한 마디 할 줄 몰랐다. 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은 그래도 전반적으로 조선 사절단의 나쁜 인상을 상쇄, 보충해 주고 있다.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은 선실에서 끊임 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담배 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 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조선 음식 등이 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배 위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어쩌면 알렌이 느낀 조선과 조선인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기 가운데에는 포크 대리 공사의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1885.2. 12.),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싸움질한 이야기까지 빠뜨리지 않고 있다(1885. 3. 27.).

 

 

 

 

   3. 선교사 알렌과 그의 선교

      1) 선교사로서의 알렌

    알렌은 외교관이기 이전에 선교사였다. 당시 한국 상황으로 보아 부득이 주한 미국  공사관부의 무급 의사로 근무하였을 뿐 그는 분명히 미국 장로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였다. 갑신정변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영익을 치료하는 것을 계기로 삼아, 당시의 국법으로는 금교(禁敎) 조치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빈번하게 접촉함으로 선교의 길을 열 수 있는 민첩성을 보였다. 그래서 헤론, 스크랜톤, 앨러스, 호튼 등이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는 자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의 예리한 현장 감각과 판단력을 지녔던 것이다.5) 예나 지금이나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조심성'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떠벌이식 선교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으로서 알렌이 가졌던 자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뒤따라 들어오는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길(입국할 수 있는 길 뿐 아니라)을 열어 주었고6), 그가 시작한 광혜원과 제중원의학교(1886. 3.29.)는 초기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와 학원 선교로 선교의 문을 열게 된 시초가 되었던 것임을 변명할 수 없다.

          

  알렌은 의사이며 선교사였다. 그래서 그는 매일 기도하면서 경건 생활(religious observances, 목회가 아님)에 힘썼고(1884.11.12), 추수 감사절 예배를 집전하였다(11.27). 그리고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 예배가 알렌의 집에서 드려졌다. 참석한 사람은 바로 앞날 도착한 헤론부부와 스크랜튼 부인의 언니, 그리고 알렌과 그 아내였다(1885. 6. 21.).

 

  김판서댁의 아들을 치료하였으나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다. …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아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이다"(1885. 3. 22.). 그는 역시 의사였으나 선교사였다.

 

  밖으로는 의사로서 혹은 외교관으로의 직무에 충실한 그였으나 사실은 먼 앞날을 바라볼 때 그는 선교사로서의 사역에 충실한 것이었다. 그가 정력을 다함으로 후배 선교사들을 위한 사역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곧 조선 선교를 용이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2) 선교사들과의 갈등과 고통

    오늘날도 선교지 마다 선교사들끼리 갈등이 없는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알렌 역시 선교사로서 선교사들과의 불화와 갈등을 통하여 시련을 겪게 된 대표적인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일기를 통하여 살펴본다.

 

  언더우드씨는 아주 빈틈이 없는 사람이고 사무적이고 민첩한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오히려 자만에 빠지고 성급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이 성격으로 장차 우리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1885. 4. 6.)

   국왕은 오늘 나에게 말 두 마리를 하사했다. 이 말들은 병원 제중원에서 쓰일 말들인데 나에게 보내진 것이다. 지금 병원 일을 도와주고 있으며 매사에 추악한 방법으로 질투심을 보이고 있는 스크랜턴 박사가 국왕이 내린 말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기가 가지겠다고 나섰다.(1885. 6. 17.)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이 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병원 일을 도울 필요가 없을 때에는 집에 머물러 있든지 어학공부를 하고 있으라는 등 아주 친절한 말씨로 충고했을 때 언쟁이 발생한 것이다. … 이러한 감정 대립이 헤론의 가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게 되었고, 헤론 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내가 선교 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선교부 사임을 구실로 이용, 돈벌이를 나서려 한다고…(1885. 9.1.)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격상 인물평을 했다. 즉, 언더우드는 위선자요 수다장이이며, 헤론은 잘 토라지는 샘꾼이라 평했다.(1886. 3. 29.)

  헤론은 연회석상에서 비기독교적 행동을 서슴치 아니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헤론과 나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886. 9. 5.)  

 

 10 월 10일의 일기에도 헤론과의 관계로 인하여 선교사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자신의 입장과 헤론 부인의 거짓과 허위 편지 작성, 여가를 즐기는 언더우드, 헤론의 나태함 등을 같은 방법으로 힐난하고 있는 일기를 썼다. 선교사들간의 관계 뿐 아니라 민영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치료받은 민영익이 자신을 친형으로 모시려한다는 제안과 그의 성격이 급하다는 글을 썼던(1885. 1. 27.) 알렌은 민영익을 '어른 애기'로 표현하며, 비겁자,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할 자, 이기적인 인간으로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한 자라는 독설을 퍼붓기도 하였다(1885. 3. 11.). 묄렌도르프나 영국인 허치슨, 파커 공사, 그 외 여러 한국인들도 있으나, 선교 정책으로 인한 갈등 부분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1885 년 6월 28일 일기에서 그는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두 마리의 말과 스크랜턴과의 갈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 논쟁 가운데 "스크랜턴은 병원 사업이 순수한 복음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선교 본부에서도 자기를 이러한 병원 사업에 종사하는 것을 승인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스크랜턴의 주장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사실 이 주장은 당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두 선교사와 알렌 사이의 갈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결국 장로교의 헤론과 감리교의 스크랜턴과 연계되어 "알렌은 누구보다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선교사업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불만으로 나타나게 된다.7)

  1888 년 조선 정부는 금교령을 내렸다. 이와 관련하여 언드우드가 갑자기 선교부와 미국 공사에 의하여 서울로 소환을 당한 적이 있다, 이 때의 상황을 언더우드의 부인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알렌의 선교 방법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 한 쪽에서는 일단 종교 활동을 포기함으로써 최소한 선교지의 발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만일 다른 길을 택하면,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곧 바로 추방당할 것이란 이야기였다.…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큰 소리로 …찬송가를 소리쳐 불렀는 데도 가장 비천한 한국인 신자를 비롯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호튼은 대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성당을 지으려한 가톨릭으로 인한 금교령일 뿐임을 강조하였다.8)

  헤론과 언더우드, 아펜셀러와 스크랜턴이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로 교단을 달리하면서도 반(反) 알렌에 대하여는 같은 보조를 취하였다9). 이 일로 인하여 선교 본부에 사의를 표명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돈벌이보다는 선교에 더 열의가 있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새 선교 사업을 시작해 보기 위해 부산으로 전근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885. 9. 1.).  또 스스로 푸념하기를  자신은 "훌륭한 선교사의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고백하면서 이따금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아둔해지거나 성미 급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1885년5월12일).

 

  4. 외교관으로서의 알렌 이해

      알렌은 한국 땅에 20년 6개월(1884. 9. -1905. 3.)을 체류하였다. 그 중에 선교사로 일한 햇수는 4년이었으며, 14년 8개월은 주한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의 미국 세력 증대가 곧 기독교 선교에 힘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10) 또 선교의 기반을 다짐으로서 머지않아 도착할 목회 선교사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궁정, 해운 세관, 병원 의사,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 공관 직원이 되었다고 그의 '조선 체류기'에서 술회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그는 게일(J. S. Gale)이 말한 것처럼 '선교사 명부에서 그의 이름이 제거'되었다. 그는 입국할 때부터 "미국 공사관의 공의"로 고종에게 소개되었으며, 또 외교관으로 일해 왔기 때문에 재한 선교사 전체의 의견은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

  그는 탁원한 외교관이었다. 미국의 외교관이기 이전에 먼저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정부로부터 벼슬을 받았고, 조선 왕실과 정부를 위하여 일하였다. 알렌이 서울에 도착한 직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기간 중 모든 외국인이 피신하였으나 그는 홀로 서울에 남아 공사관을 지켰다), 청일 전쟁(그 와중에도 홀로 서울에 남아 부상병들을 치료하였다)과 한말 격동기의 위기를 몸으로 겪었다. 조선 국왕의 고문관으로, 그리고 외교관으로 활동한 그가 친노·반일 정책을 주장하다가 소환까지 당한 것도 사실은 한국 독립의 보장을 위한 생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3 년 미국 신문에 게재된 고종 황제와 미국 아가씨 에밀리 브라운 양과의 결혼 보도 사건은 분명한 오보와 날조된 기사였다. 그러나 『알렌의 일기』 제3편에 실린 논문은 이 결혼 사건은 알렌과 절친한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래프'지의 편집장 리텐하우스가 알렌의 한국구국운동에 감동을 받아, 고종 임금과 알렌의 관계를 풍자적인 픽션 기사로 꾸민 것으로, 에밀 부라운의 자리에 알렌을 대치하게 되면 알렌의 대한제국에 대한 충정을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3) 이 논문은 루즈벨트의 친일·반로 정책에 의하여 한국의 운명과 함께 알렌도 쓰러지고 말았다는 표현과 함께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후기에 있어서 가장 헌신적인 독립투사는 국내에는 민영환, 외국인으로는 알렌이었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그 역시 순수한 미국인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미국의 이권 수호(철도·전차부설권, 전등가설권, 광산 채굴권 등)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미국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1) 김원모역, 『알렌의 일기』, (서울 :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日記임으로 내용을 소개시 도서의 페이지가 아닌 날짜를 기준으로 인용함.  

       2) 그의 일기 중에는 병원 설립과 관련하여 '묄렌도르프'와의 관계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1월 22일 일기에서는 그가 나의 계획을 방해할 것이라 하였고, 2월 20일 일기에는 묄렌도르프로 인하여 병원 설립의 기쁨보다 '조선을 떠나고 싶었다'고 기술하였다. 적은 봉금과 부채로 인한 금전적인 어려움을 털어놓고 있다. 4월 10일자 일기에 기록된 병원 개업 일은 실제적으로 4월 9일(yesterday)이다.    

       3) 이 부분은『알렌의 조선 체류기』(윤후남역,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p.11, 204)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알렌은 병원과 의학교(醫學校)의 일로 1886년 6월 14일 여의사 엘러스(Annie J. Ellers)와 함께 당상관 통정대부(정3품, 참의)의 벼슬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이 일을 6월 24일자 일기에 둘째 아들 분만(22일) 내용과 함께 적었다. 알렌은 그의 표류기에서 자신이 병원을 그만 둔 후 정부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미국인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후원으로 병원 이름이 바뀌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같은 책, pp.204-205).    

       4) 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 중 중요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주한 미공사관의 서기관이 된 그는 1892년《한국휘보 The Korean Repository》를 창간하고, 1895년 J.모스에게 운산(雲山)광산의 채굴권, 96년에는 경인철도(京仁鐵道) 부설권을 주선하였으며, 1897년 주한 미국공사 겸 서울주재 총영사가 되어 전등·전차선로 부설 등을 위한 권리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1900년 영국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를 결성했으며, 1901년 주한 미국전권공사가 되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일등(勳一等) 및 태극대수장(太極大綏章)을 받았다. 저서에 《Korean Tales》 《Things Korean》 《The Awakening of Korea》 등이 있다.

    < 이상『두산 대백과사전 1999』, (서울 : 두산동아, 1998)을 참고였음>.   특히 그가 편찬한 《한국 외교사 연표》는 구한 말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기철·신용철 편저, 『새 우리말 큰 사전』, 서울 : 삼성출판사, 1980). '앨런' 참고>.

       5) 병원 개업 이후 알렌이 선교사라는 사실을 유포하여 추방하려는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조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3월 31일. 독일의 부들러 등).    

       6) 실제로 뒤따라 입국한 선교사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다. 1885년 4월 3일 일기에는 언더우드의 내한을 기다리고 있음을 표현하였고, 내한 후 언더우드 역시 알렌을 찾았다(4월6일). 그리고 그는 알렌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6월28일).   

    7) 민경배,『알렌의 선교와 근대 한미 외교』, (서울: 연세대출판부, 1989). p.237.

       8) L. H. 언더우드, 이만열역,『언더우드』, (서울: 기독교문사, 1999). pp.81-85. 언더우드의 부인인 호튼은  누구보다 알렌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부터 알렌과 함께 대궐 출입을 하였고, 또 민비에게 종교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귀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비에게 전도를 시도한 것은 언더우드 부인이 되고 난 이후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그녀도 '한국에 온 목적인 그 주제에 대해서'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참았던 것이다. 민경배, p.242.

    9) 민경배, p.237.

       10) Ibid., p.312.  알렌이 미국 자본의 한국 진출을 외교적으로 강력하게 밀고 나간 세 가지 목적 중 첫 번째가 미국 세력은 곧 기독교 선교와 관계가 깊다는 것이었으며, 둘째와 셋 째는 각각 한국의 자발적인 요청, 반일(反日)을 위한 위상 확보였다는 것이다.

    11) 『알렌의 조선 체류기』, p.185.

    12) 민경배, p.312를 참조하되, J.s. Gale, Korea in Transition, New York :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09. p.163의 재인용.    

    13) 알렌의 일기, p.391.  
내용출처 : [기타] http://www.cwmpcts.org/main/cwm-resources/study/articles/graduate-student/graduate%20student-001/Mission_Field_Study/allen.htm